0칼로리가 될 수 없는 감정 다이어트
체력소진으로 이어지다
홍보인의 주 업무는 하루에 수십명의 기자를 상대하고, 어떻게하면 잘 보일까(부정기사가 안 나갈까) 머리를 굴리는 일이다. 그러다보면 일로서 지치기보단 사람에 치이기 일쑤고, 그만큼 감정소비가 상당하다.
물론 어느 직무야 안 그렇겠냐마는, 특히 홍보는 (때론 갑이 될 수 있는 대기업이 아닌 이상) 항상 감사하고 죄송하다. 무엇이 그리 죄송한지 모르겠으나, 하루종일 죄송하다. 공손해야하고 혹여나 기자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까 워딩 선택이 조심스럽다. 심기를 건드린다는 건 부정기사로 이어질 확률 99.99999%이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부탁한다 는 단어를 싫어하고 절대적으로 안 쓰려 한다. 죄송하다는 사과도 진심이 아닌 이상 자제한다. 말에 담긴 무게에 내 가치도 반영된다고 생각하기에, 어떤 말이든 으레적으로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출근하는 순간부터 부탁한다, 죄송하다는 말을 수십번 사용하고 있다. 이건 마치 팀장 카톡에, 입으론 욕하면서 손으론 넵 넵! 네넵!을 올리는 것과 같다. 안하면 어색하고 해야 공손해 보이는 공적인 용어가 된 것이다.
멧돼지도 때려잡을 20대땐 하루에 서너개의 미팅을 해도 거뜬했지만 15년차 훌쩍 넘으니 점심미팅에 이어 티미팅까지 이어지면 그날의 에너지가 모두 소진된다. 혹여 침묵의 공간이 생길까 쉼없이 떠들어야 하는 압박감에 점심미팅에서 밥을 온전히 먹기란 쉽지 않다. 고작해야 1/3 정도 털어넣는 수준이다. (조금이라도 침묵이 느껴지면, 그래 내가 일하러 왔지 밥먹으러 왔냐는 생각에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을 쏟아낸다)
물롬 마음에 맞는 기자를 만나 수다 아닌 수다를 떨때는 그나마 부담이 덜하지만, 긴장 수준은 똑같다. 혹여 친근해짐이 느껴져도 선을 넘지 말아야 하니 긴장 선을 타야하고 그들이 선을 넘지 못하게끔 해야하니 이 또한 긴장선을 타야한다.
그렇게 면대면과 전화로 수십명과 대화를 하다 퇴근하면 감정소비가 바닥을 친다. 딱히 불편함과 껄끄러움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힘이 든다. 마치 체육대회를 한 것마냥 체력소모로 이어진다. 그래서 웬만하면 일상에서 새로운 사람 만나기를 기피한다. 약속을 잡더라도 편한 지인만 만나려 한다. 애써 잘 보일 필요 없는 익숙함만 찾는 것이다. 개그맨들이 집에 오면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지금도 홍보일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얻게 된 것은 여러 개의 가면이다. 때와 장소에 따라 어울리는 가면을 쓰고 사람을 대할 수 있다. 적절한 대화와 제스처를 취하는 법을 터득했고 나름 분위기를 주도할 줄 아는 스킬을 익혔다. 이것이 노하우로 쌓이고 나름 자산이 됐다고 생각하니 지금도 홍보일을 하고 있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