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차림, 준비성 그리고 주관
나는 문구 덕후이다. 어제도 아이가 내 얼굴을 유심히 보다 "아빠 절대 화내면 안 돼요"라고 말하면서 아빠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 무섭다는 말을 할 정도로 생긴 것과 다르게 무엇인가를 기록하기 위해 문구를 사용하며 그 어떤 것보다 문구에 진심이다. 디지털 기기를 사용할 때도 있지만 기록에 있어서는 종이와 펜만큼 손과 뇌를 자극하는 도구는 없다고 생각한다.
천부적으로 글쓰기 재능이 뛰어난 아내도 학창 시절부터 문예부 활동을 할 정도로 글쓰기 시간을 보냈고 펜글씨도 잘 써서 나름 문구 덕후라고 자부하고 30년 넘도록 살았지만 나를 만난 후 자신은 더 이상 문구 덕후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아내는 질을 따지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문구의 양과 종류에 압도되어 문구 덕후가 아님을 선언했다고 생각한다.
나도 아내도 문구를 좋아하기에 아이도 자연스럽게 문구 덕후로 성장 중이다. 유전의 비밀이 정말 신기한 것이 말을 배우기 전부터 가위로 무엇인가를 자르고 오리는 것을 좋아했던 아이는 직접 캐릭터를 펜으로 그리고 색칠하여 종이 인형 만들기 놀이를 할 만큼 문구를 잘 활용한다. 나는 주로 기록하는 데 문구를 사용하는 반면 아이는 무엇인가를 창작하고 만드는 데 문구를 사용한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이렇게 사용법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나와 아이는 문구 덕후이다. 그만큼 문구에 진심이며 핫트랙스, 아트박스, 심지어 다이소의 문구 코너조차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가지고 있는 문구라 할지라도 새로운 제품이 발견하면 내가 가진 것과의 차이점을 찾아보고 무엇이 다른지 확인한다. 때론 구매하는 경우도 있지만 나와 아이는 무조건적인 소유는 금기시하고 있어 새로운 것을 무턱대고 구매하지는 않는다.
나보다 더 문구를 더 좋아하는지도 모를 아이에게 항상 전하는 문구 덕후의 기본자세는 '알아차림'이다. 일단 어떤 제품이 나와 맞는지를 스스로 알아야 한다. 수많은 문구 브랜드 중 어떤 브랜드가 자신과 맞는지 실구매하여 직접 사용하면서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긴 하지만, 이 절차는 알아차림의 매우 중요한 순간이다. 아무리 고가의 브랜드 제품이라 할지라도 나와 맞지 않는다면 그저 비싼 제품에 지나지 않는다.
한 예로 지인에게 고가의 만년필을 선물 받은 적이 있는데 가격도 부담스럽거니와 손에 쥘 때의 불편함 때문에 자주 사용하지 않고 그저 서랍 어딘가에 보관만 하고 있어서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지를 결정하는 알아차림의 과정은 필수적이다. 누군가의 시선을 끌기 위한 문구가 아닌 실생활에서 자주 그리고 편하게 사용하기 위한 문구를 알아차림의 과정은 문구덕후에게는 꼭 필요하다.
두 번째 문구 덕후의 자세는 '준비성'이다. 나에게 맞는 제품을 찾았다면 사용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늘 여분의 제품을 구비하거나 리필심을 준비해야 한다. 요즘 가장 많이 사용하는 멀티 수성펜의 경우만 해도 리필심을 충분히 준비해 놓았는데, 수입품이다 보니 구매하려고 했을 때 결품되는 일이 종종 있다 보니 재고가 있을 때 미리 구매해 놓는다.
요즘은 'PILOT' 제품을 가장 많이 사용하지만 나에게 잘 맞는 브랜드는 라미, 스테들러, 모나미 제품이다. 특히 내가 학창 시절에 가장 많이 사용한 제품은 모나미 제품이다. 군복무 중에는 모나미 플러스 펜을 한 통 여분을 준비하고 있을 정도로 많이 사용했고 지금도 사용하는 모나미 153 시리즈 유성볼펜은 가성비가 아주 뛰어난 상품이며, 당시에는 몰랐지만 리필심만 구매하면 거의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리필심을 구매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 매번 새 상품을 샀던 것을 생각하면 아쉬움만 남는다. 물론 다 쓴 플라스틱 몸체를 이용해 만들기 재료로 사용할 수 있었지만, 손때 묻은 볼펜을 심만 교체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정말 익숙함의 진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새 볼펜을 살 때마다, 항상 여분의 리필심을 같이 구매하는 습관이 생겼다.
가금 아이가 내 가방을 검사하는 일이 있는 데, 안쪽 주머니에서 아이와 함께 다이소에서 구매한 집봉투를 보고 아이가 깜짝 놀라 나에게 물었다. 그 안에는 지금 사용하는 멀티 수성펜의 리필심이 가득 담아 있었기에 수량에도 놀랐지만 이걸 다 쓸 수 있냐는 궁금증이 생겼다고 했다. 물론 다 쓸 수 있는 분량이며 검은색 리심필의 경우에는 2주에 하나 꼴로 사용하기에 많아 보여도 나에겐 부족한 수량일 수도 있다.
<독서의 기록>, <여행의 기록>의 저자이신 안예진 작기님의 '성공의 기록 다이어리'를 주로 사용하면서 문구를 가장 많이 사용하며, 올해부터 5년 일기도 쓰고 있어서 이래저래 문구를 사용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이전부터 다이어리를 쓰고 있고 기본적인 사용량이 많기도 했지만 요즘은 한 다이어리에 하나의 특정 볼펜을 사용한다. 옆에서 지켜보는 아내의 눈빛이 심상치 않지만 문구 덕후에게는 자신만의 주관이 정말 중요하다.
이것이 내가 주장하는 문구 덕후의 마지막 기본자세 '주관'이다. 누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자신의 주관대로 문구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문구는 사용의 용도보다는 소유의 용도가 커질 수 있어 주관이 없는 문구 덕후는 소유의 노예가 되기 쉽다. 안 그래도 주관이 뚜렷한 나는 문구 덕후가 되면서 더욱 확고하고 뚜렷한 나만의 주관을 가지고 문구 덕후의 삶을 사는 중이다.
새해맞이 서제를 정리하면서 박스에 담긴 문구류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사용하지 않는 제품은 나눔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끼던 만년필을 보면서 선물하고 싶은 분이 떠올라 어떻게 전할지 고민하며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본다. 지금 나에겐 필요 없지만 그분들에게는 좋은 도구가 되기를 바라며 문구 덕후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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