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아 Aug 09. 2023

일본 도자기 여행

침략과 약탈의 흔적

 ‘이도 다완’이라는 일본의 보물에 대한 기대는 실물을 보기 전과 후가 많은 차이가 있다. ’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는 말처럼 한 국가의 보물이라는 기대는 막상 실문을 영접하는 순간 안개처럼 사라진다. 특히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유산으로 받은 한국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한 이유는 이도 다완은 그냥 흔한 막사발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평민들이 사용하던 막사발보다 더 예술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상태이지만 이도 다완은 일본의 보물로 전해 내려 온다. 일본의 자기에 대한 동경은 토기를 만들던 시절부터 존재했었고 토기의 나라, 가야와 오랜 교역을 하면서 우리의 문물에 대한 높은 평가와 함께 언젠간 그들도 우리처럼 화려한 고려청자와 순백의 조선백자를 만들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있었을 것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소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보통의 문명을 전달이 아닌 전쟁으로 인한 문화의 약탈뿐만 아니라 유명한 사기장을 모두 납치해 감으로써 조선의 자기 산업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지만 자기 산업의 불모지였던 일본은 꿈에 그리던 자체 생산뿐만 아니라 해외로 수출까지 하는 발전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 산업의 발달은 훗날 세라믹스 소재 개발에도 영향을 주어 일본이 핵심 기술 보유 국가로 성장하는데 적지 않은 자양분이 되었다. 성리학의 예를 중시했던 조선은 고려청자부터 전해 내려 온 뛰어난 자기 기술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침을 막아내지 못하고 가마터가 파괴되고 사기장을 모두 빼앗겨 한동안 자기의 품귀현상이 일어났다.


  조선을 지배했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가치관은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하는 선택과 행동을 하였지만 일본은 이웃 국가들과 오랜 시간 교역을 하면서 상업이 발전했고 국가적으로 상업의 발전을 위해 상인들을 우대하며 기술을 우대하는 사회적 풍토를 만들었다. 만약 일개 사기장에 불과했던 이삼평이 조선에 남아 있었더라면 오늘날의 일본 자기 산업이 존재했을지에 대한 의문과 이삼평에 대한 평가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일부 신사에서는 신으로 모시는 존재가 된 이삼평은 고국을 떠나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타국에서 생을 마감하는 불행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당시 높은 온도를 낼 수 없었던 일본의 가마를 개량하고 자기를 만들 수 있는 재료를 일본에서 찾아내면서 가히 신으로 불릴만한 업적을 쌓았다. 이러한 그의 노력이 일본 입장에서 국외로 유출되면 안 되는 핵심 기술의 보유자로 자국 산업 발전을 위해 꼭 지켜야 하는 핵심 인재가 되었다. 만약 그가 조선에 있었다면 뛰어난 자기를 만드는 사기장이 될 수 있었겠지만 일본에서와 같은 대접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냥 평민 중 한 명으로 양반들에게 도자기를 판매하는, 조선 양반 입장에서는 천한 기술자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명분만 추구해서도 실리만을 추구해서도 안 되지만 한쪽에 치우친 선택을 해서는 더욱 안 된다. 하지만 조선은 명분만을 추구했고, 왜란 직전 조선통신사를 통해 일본이 침략할 것이란 정보를 들었음에도 당파 싸움으로 인해 귀를 닫았으며 십만 양병설에 대한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일본을 너무 얕잡아 보았기에 두 번의 왜란을 겪으며 왕이 피난 가는 치욕을 맛보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치욕 속에서도 조선을 변하는 것이 없었고, 훗날 또 다른 호란을 겪게 된다.


 나도 예의를 중시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조선은 너무 예만 중시해서 다른 것을 염두에 두거나 고려하지도 않았다.  무엇에 집중할지 모르는 조선의 성리학 추종자들에게 어쩌면 왜란은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필요는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