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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 Aug 20. 2023

정본 발해고

역사 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해동성국

유득공의 <발해고>는 지금 현존하는 발해 역사서 중 최초의 역사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내가 배웠던 역사 교과서에는 단 한 줄만 나오지만 오랜 기간 자료 수집과 수정 보완을 거쳐 세상에 나온 발해의 역사서이다. 하지만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득공 자신도 초고본 서문에서 밝힌 것과 같이 세가, 전, 지라 하지 않고  ‘고’라는 이름을 붙인 것 같다.


 유득공의 초고분이 <요사>를 답습한 <대청일통지>의 지명을 확인 과정 없이 그대로 차용하였기에 발해 동경 용원부의 위치를 잘못 표기하는 시대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이전 발해에 대한 기록이 없었기에 중국의 역사서를 바탕으로 편찬되었기에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던 발해와는 달리 당의 기년을 사용하는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당과 왜국에 사신을 보내며 활발한 외교활동을 했던 발해의 기록은 역사적 시기가 아닌 ‘문왕 때’나 ‘무왕 때’로 막연히 서술하였다.


 이것을 인지하였기에 미비한 자료를 보완하고자 지속적인 수정 작업을 했었다. 만약 발해고가 조선 시대가 아닌 고려 시대 때 발간되었다면 보다 정확한 사실을 바탕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란 역사적 아쉬움이 있다. 고려 태조 왕건도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했지만 고구려의 부활을 꿈꾼 발해에 대한 계승은 하지 않았던 또 다른 역사적 아쉬움이 가득하다.


 발해는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 중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나라로 5경 15부의 행정구역을 가지고 효율적인 관리를 하기 위해 노력했고 중국조차도 ‘해동성국’이라 표현하며 발해의 존재를 인정했다. 중국뿐만 아니라 신라, 왜국에 지속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 관계를 맺어 왔으며 특히 왜국에는 ‘발해로’라는 발해에서 왜국으로 가는 바닷길이 있어서 북방에 있는 나라지만 조선술과 해양술에 능했음을 알 수 있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답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당나라에 대응했고 거란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북방 영토를 호령한 우리 민족 자랑스러운 역사의 한 부분이다. 발해는 데릴사위제도가 있어서 여자를 재물로 치부했던 고구려와는 달리 기생이 없던 유일한 나라였으며 부부 합장을 주로 하는 고대 국가 중 가장 여성의 지위가 높은 나라였다.


 역사적 사료도 부족하고 갑자기 거란에 의해 멸망해버린 의문 가득한 미스터리를 가진 발해의 역사는 늘 아쉬움과 ‘수수께끼’라는 수식어가 따르는 원통함이 있다. 내가 역사적 사실 중 두 번째로 아쉬워하는 점이 바로 발해가 그렇게 빨리, 의문투성이로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역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대인선의 세자 대광현이 무려 유민 10만 명을 이끌고 고려로 왔지만 고려의 누구도 발해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더 큰 아쉬움이 가득하다.


 발해는 멸망 이후 후발해국, 정안국, 흥료국을 세워 저항하며 발해를 이어나가고자 했고 고려로 이주하면서 끊어지지 않고 우리의 역사 속에 편입되었다. 발해의 대부분의 영토가 지금은 마음대로 갈 수 남의 땅이 되었지만 우리는 발해의 역사를 절대 잊으면 안 된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여 우리의 역사를 정확히 알고 바르게 기억해야만 한다.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https://brunch.co.kr/@ilikebook/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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