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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 Sep 04. 2023

가네코 후미코

조선을 사랑한 시대 저항 정신

요즘 육군사관학교 충무공관 앞에 있는 독립투사 흉상 중 홍범도 장군님의 흉상 이전 문제로 세상이 시끄럽다.  이전의 가장 주된 이유가 홍범도 장군님의 소련 공산당 가입 이력 때문이라는데 당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산당이라는 단어 하나만 보고 판단하는 현실이 아쉽기만 하다. 자신의 인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독립투사 앞에서 털어서 나온 먼지를 구실 삼아 독립운동의 행적마저 폄하하는 것은 부관참시보다 더 치욕을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다행스럽게도 조선 사람만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일본인 중에서도 일본제국주의의 부당함과 조선을 식민지 삼은 것을 반대하며 저항하였다. 특히 일본인 중 여성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냈던 가네코 후미코는 영화 <박열>을 통해 사람들에게 더욱 잘 알려지게 되었다. 후미코가 독립운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고, 천황에게 폭탄 테러에 가담했다는 것으로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그녀는 기존 질서에 저항했고 저항이라는 행동의 통해 삶의 기쁨을 느꼈다.


당시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일본의 국민으로 무엇이 아쉬워서 제국주의의 부당함을 설파하며 조선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만들었을까라는 생각이 그녀에 대한 궁금증으로 번져 갔다. 부모님께 사랑받지 못하고 방치되고 버려진 그녀는 무적자의 신세에서 충북 청원에 살고 있던 고모의 집에 들어가게 되면서 약 7년간 조선에서 살았다. 당시 그녀는 조선 땅에서 불같이 퍼지고 있는 운동을 직접 목격하게 되는데 그 운동은 바로 3.1 운동이다.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독립운동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민운동인 3.1 운동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함을 물론 일본의 불법적인 한국 강점에 대한 저항과 불복종을 천명하는 거국적인 운동이었다. 일본인으로 식민지였던 조선 땅에서 이런 운동을 목격한 후미코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영감을 받게 되어 조선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3.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조선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그녀는 고모에 의한 학대를 통해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부정이 가득했을 것이다. 이런 부정을 불타는 학구열로 승화시키며 낮에는 일하고 야간 영어교습소에 다니는 등 혼신의 노력을 했지만 그녀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고 이때 사회주의자와 교류하게 되면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가 된다. 특히 1922년 독립운동가 박열을 만나 동지이자 연인으로 함께 조선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했다.


 당시 일본은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란 뜻인 ‘불령선인’으로 저항하는 조선인들을 핍박하였는데 박열을 중심으로 조직된 불령사도 이 핍박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간토대지진으로 엉망이 되어 버린 현실 속에 황제를 향한 폭탄 테러란 죄명으로 재판에 회부된 박열과 후미코는 사형을 선고받게 되지만 후미코는 옥중에서 기존 질서가 자신에게 부여한 사형이란 결과를 자신이 자신의 의지인 자살을 함으로 끝까지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버려진 그녀의 유년 시절, 친척에게도 학대와 미움을 받았던 후미코는 인간의 참된 본질 중 하나인 사랑을 믿을 수 없게 되었고, 인간을 신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진전 자신의 의지와 자유만을 믿었던 그녀는 <개새끼>라는 시를 통해 박열에게 매료되었고, 박열과 함께 하며 그의 운동과 사상을 지지하는 동료이자 부부로 서로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박열과 후미코의 사상 기저에는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가 자리 잡고 있어서 그들이 민족주의자이며 독립운동가라는 것에 의문을 품는 주장도 있지만 그들은 당시 권력의 중심인 일본에 저항하였고, 일본의 모든 것이라는 천황을 제거함으로 일본 정부를 무너트리려는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기려 했다는 것만으로 독립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다고 생각한다.


 당시 조선은 독립이 간절했고 (지금의 변질된 공산주의인 북한식 사회주의가 아닌) 사회주의든 무정부주의든 민족주의든 일본을 무너트려 조선의 독립을 앞당기는 모든 활동은 독립운동으로 보는 것이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박열과 그의 동지 후미코의 저항은 다분히 독립운동의 일환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후미코는 일본인으로 조선을 사랑했고 그 사랑을 일본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표현했으며 일본인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일본의 제국주의 정부를 향한 저항으로 시대를 일깨우는 선구자이자 저항정신의 상징이다.


https://youtu.be/z7yJBRiyLFY?si=1EPKeEb5zIojiL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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