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린 새벽의 행복
초등학교 1학년 때 부산에 전학을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으면서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희귀한 광경은 눈을 보는 것이다.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에서 겨울에 눈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8,9년 주기로 싸라기눈을 보기는 했지만 지면에 쌓일 정도로 내리는 눈을 보지는 못했다. 눈 내리는 날이 확률적으로 거의 없다 보니, 부산 사람들은 눈에 대한 로망이 있다.
나는 유년기를 서울에서 보냈기 때문에 겨울에 눈 내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긴다. 눈 내리는 날에는 어김없이 우산을 챙겨 나가고, 겉옷에 쌓인 눈을 아무 생각 없이 털어 버린다. 부산에 살면서 이런 당연함을 잊고 살다가, 군 복무할 때는 경기도 북부에 있으면서 눈 내리는 날을 왜 쓰레기 치우는 날이라고 하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순백의 눈은 땅에 쌓이는 순간 치워야 할 대상이 된다.
특히 군부대가 있는 지역은 도로망이 발달된 곳이 아니기에 제때 눈을 치우지 않으면 안에서 밖으로 나가거나, 밖에서 안으로 진입하는 차가 오고 가는 것을 어렵게 하여 고립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부대의 출입구인 위병소부터 우선순위를 두고 제설 작전을 실시한다. 싸릿비와 넉가래뿐이지만 인력을 동원하여 입하는 제설 작전은 실제 전투와 맞먹는 긴장감이 있다.
식목일 나무를 심을 때도 눈이 내리는 경기도 북부는 부산에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평생 보고도 남을 눈을 볼 수 있게 한 특별한 경험이었다. 만약 부산에 3cm 정도의 눈이 쌓이게 된다면 부산 시내 교통은 거의 대부분 마비될지도 모른다. 지형적으로 산이 많기도 하지만 평소 눈 내리는 것에 대한 대비가 없기에 제설제나, 제설도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에 구비되지 않은 곳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딱 한 번 눈이 조금 쌓일 정도로 내린 날에 차를 도로에 버리고 걸어서 집에 간 적도 있었다.
이런 안 좋은 기억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눈을 정말 싫어했고, 눈이 내리면 이유를 알 수 없는 스트레스에 눈을 치워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들기도 했다. 군 복무 중에는 누구보다 전투적으로 제설 작전에 임하기도 했다. 5년 정도 서울에 근무했을 때도 눈 내리는 날은 항상 엉금 엄금 걸어가며 엉덩방아를 연신했기에 더더욱 눈 내리는 날이 싫어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삿포로 여행을 하면서 눈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고, 지금은 눈을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겨울만 되는 키보다 높게 쌓여 있는 눈을 보기 위해 삿포로에 갈 정도이다. 코로나19 때는 방문하지 못했지만 올해는 삿포로의 눈을 볼 수 있어서 눈에 대한 나의 로망을 채울 수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이제 더 이상 쓰레기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한 대사 때문에 CF 패러디도 많이 되는 영화 <러브 레터>의 배경은 삿포로이며 오타루, 하코다테는 삿포로에서도 눈 내린 절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을 방문하면서 왜 절경이라고 부르는지 한 1초 만에 알게 되는 것은 세상을 온통 하얗게 만드는 순백의 눈이 가진 힘이다. 아무런 생각도 욕심마저도 사라지게 만드는 강력한 마법이다.
새벽에 일어나 보니 바깥은 순백의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남쪽나라에서는 예상할 수 없는 일이라 자고 있는 아이를 깨워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인 풍경을 보여줬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좋아하는 아이의 웃음과 같이 어쩌면 눈은 순수하며 행복하게 만드는 매개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뒤 해가 뜨면 눈 녹듯 금세 사라지겠지만 잠시라도 행복을 준 눈에게 너무 고마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