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돌봄이 필요한 그대에게
초등학교 저학년은 돌봄 교실이라는 시간이 있다. 아직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등 저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다. 또한 사회적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돌봄은 나이와 지위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필요하다. 어른이 되면 돌봄이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막중한 책임감으로 말 못 할 스트레스를 겪는 어른에게는 더 돌봄이 필요하다.
https://youtu.be/CD1GV3Z9yAQ?si=AcM7e6ssxOuaXZq8
한 예로 한국전쟁의 비극을 배경으로 만들 <국제시장>이란 영화에서 덕수라는 주인공 역을 했던 황정민 님의 독백을 보면 돌봄의 필요를 느낄 수 있다. 흥남항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을 듣고 장남이자 집안의 가장이 되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오직 가족만을 위해 악착같이 살아온 주인공이 노년이 되어 아버지 영정사진 액자를 보며 이런 말은 한다.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부모님의 눈에는 아이로 보이며, 이런 나를 돌봐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내 아이가 성장해도 내 눈에는 항상 어린아이로 보일 것이다. 이렇듯 자기돌봄은 인간이라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자 외적, 내적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라면 자기치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나를 고통 속에 방치하며, 내 내면의 소리를 무시하고 방관했던 적이 많았다.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에 내 마음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것도 모른 채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 사실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치유의 글쓰기를 체험하게 되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자기돌봄은 커녕 방치하고 방관하던 과거를 후회하기보다는 이제라도 나를 돌아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매일의 글쓰기를 하면서 매일 나와의 대화를 하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다. 나와의 대화를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문답법이다. 매일 새벽 거울 속의 나를 보며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이 내면의 소리를 내가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는 왜 나를 이렇게 대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단순한 습관이나 루틴이 아닌 진정한 질문이 되도록 살아있는 질문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질문이 죽으면 삶은 고착되고 습관만 남는다. 그냥 반복만이 있게 되면 살던 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내일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온 나의 모든 행동과 감정의 결과이기에, 오늘의 모든 순간, 행동과 감정에 집중해야 한다.
고통은 기대와 현실의 차이에서 비롯되기에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느끼는 인간에게 고통이 없을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와 ‘내가 바라는 나’, 그리고 ‘남이 바라는 나’ 속에서 갈등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불일치(Self discrepancy)’로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다. 완벽주의는 자기불일치에 따른 자기조율의 실패로 자기부조화를 만들며 이것이 악순환의 시작이다.
완벽한 인생은 없기에 인생에서 완벽주의는 필수조건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절대 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서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도 다시 시도하며 도전하는 자세가 인생의 여행자로 반드시 필요하다. 원하는 대로 될 때도 있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는 인생의 시간 속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통합과 수용이다. 자기돌봄은 자신의 모든 순간 속에서 서로 관계를 이어주는 접착제와도 같은 것이다.
순간이 모여 인생이 된다. 그 순간을 이어주는 접착제인 자기돌봄을 통해 만들어지는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그 접착제를 사용하는 자신에게 달려 있다. 큰 꿈을 꾼다면 그 꿈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을 만들면 되기에 수많은 인생의 조각을 모아, 자기돌봄의 시간을 가지며 서로 연결해야 한다. 자기돌봄이 이어주는 인생의 순간, 기대되고 또 기대되는 소중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