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팅기를 고쳐야 하는 이유
요즘 매일 일기 예보를 확인하는데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 알기 위함도 있지만 과연 오늘의 최고 기온은 몇 도일까 궁금해서이다. 한낮 기온이 33도를 넘는 날이면 퇴근 후 저녁에 달리기를 하면 아직 뜨겁게 달궈진 대지의 온도로 조금만 달려도 금세 땀에 흠뻑 젔는다. 어제 감정코칭 마지막 회기라 전체 행사도 있었고, 준비하느라 조금 무리를 해서 약간의 감기 기운도 있어 오늘은 집에서 쉬기로 했다.
아내와 외출 계획이 있었던 아이가 내가 집에 있는다는 것을 알아 나와 같이 집에 있고 싶다고 말해 아내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함께 외출을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잠시 아내와 아이가 실랑이를 했고 아내는 시간 약속이 되어 있는지 아이를 나에게 맡기고 서둘러 외출을 했다. 아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신이 생각해 둔 오늘의 계획을 나에게 말하고, 첫 번째 계획 만들기 놀이를 하였다. 아이는 인터넷에서 자신이 만들고 싶은 도안을 찾아 출력을 종종 요청해서, 이사 오면서 무한 충전 잉크 프린터를 설치해서 아이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출력을 해준다.
출력 후 오랫동안 가지고 놀기 위해 코팅까지 해서 오리고 붙이기를 한 후 만들기를 완성했는, 한 두 달 전에 아이가 직접 코팅을 하다가 코팅지가 말려 들어가는 일이 발생해서 코팅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코팅기 제조사에 AS를 맡기려고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코팅기가 고장 난 것도 잊고 있었는데, 오늘 아이가 코팅을 하고 싶은데 못하니 아스테이지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해 서제에 보관 중인 아스테이지를 가지고 와서 아이가 오리면 나는 아스테이지에 넣고 손코팅지처럼 붙여 주었다.
아스테이지는 군 복무 중 참 많은 사용 했는데 각종 교육자료나 현황판을 만드는데 참 유용한 재료이다. 특히 근무 체크리스트를 만드는데 아스테이지만큼 가성비 높은 것이 없어 늘 한 마 이상 쌓아두고 수시로 사용했다. 하지만 아스테이지는 가성비 좋은 재료이긴 하지만 사용 후 잔재가 너무 많이 남는다는 단점이 있다. 오늘도 아이의 만들기 놀이 과정 중 나오는 종이 조각뿐만 아니라 아스테이지 잔재를 보니 군 복무 중 아스테이지 잔재로 가득 채워진 행정반의 모습이 생각나서 매번 손으로 부착해야 하는 불편함도 해결할 겸, 직접 코팅기를 고치기로 했다.
일전에 코팅기가 고장 나서 분해해 본 적이 있기에 망설이지 에 않고 코팅기 뒷면에 있는 나사를 푸는 것을 시작으로 커버를 벗겨내고 문제의 롤러를 살펴보았다. 열선이 있는 롤러에 단단히 감긴 코팅지를 보니 쉽지 않겠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아스테이지 지옥보다는 고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라 생각해 롤러 커버를 벗기기 위해 코팅기 내부의 구조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나사로 조인 부위를 살피다가 열선이 있는 롤러 커퍼 조임 나사를 발견해서 나사를 풀고 커버를 벗긴 다음, 롤레에 감긴 코팅지를 제거했다.
코팅지를 제거한 후 롤러를 보니 아이가 무엇을 넣었는지 모르겠지만 롤러 표면에 접착제가 묻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접착제를 닦아내고 롤러 표면에 더 이상 끈적임이 없는지를 확인한 후 다시 조립했다. 조립은 분해의 역순, 분해한 순서를 기억하며 풀었던 나사를 하나씩 조여 조립을 마쳤다. 이제 코팅이 잘 되는지 점검하는 일만 남았는데 긴장되는 마음으로 인쇄했던 포토카드를 코팅지에 넣으니 문제없이 코팅이 잘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에게 코팅이 잘 되는다는 사실을 말해주니, “아빠는 역시 이공계야”라며 칭찬을 해 주었다. 아이의 칭찬에도 기분이 좋았지만 그동안 코팅을 못해 만들기 놀이를 할 때마다 박스테이프를 이용해 하나씩 붙이던 아이의 불편함과 그것을 바라보면 나의 안쓰러움을 모두 해결해 준 오늘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다. 만약 아이가 아내와 외출했었다면 코팅기는 아직도 아이 책상 밑에 여전히 고장 난 채로 방치되어 있었겠지만, 아이가 나와 함께 집에서 시간을 보낸 덕분에 그동안 미뤄왔던 코팅기를 고칠 수 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분해하고 조립하는 놀이를 좋아했다. 부모님께서 사주신지 얼마 되지 않은 로봇도 분해해서 며칠 걸려 조립한 일이 들켜 혼나기도 했지만, 설계도 없이 조립된 부위를 확인하고 분해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었다. 이런 흥미로 기계공학과에 진학했다면 지금도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는 직업을 가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레더맨 멀티툴을 항상 휴대하고 다니며 풀린 나사를 조이고 분해하는 일을 종종 한다. 훗날 아이폰을 분해 후 재조립하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지만, 언젠가 그 생각을 현실로 이룰 날도 올 것이다.
코팅기는 다시 코팅을 하는 제 역할을 하게 되어 그동안 밀린 업무를 하는 중이다. 코팅기를 고치지 않았더라면 큰일이 났을 정도로 아이는 다시 만들기 놀이에 열중하며 콧노래를 부르며 무언가를 만드는데 집중한다. 매일 아이와 놀아주지 못해 미안했던 감정이, 주말만이라도 아이와 놀아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나의 소박한 흥미이자 재능이 아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음에 또 한 번 감사하는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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