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기로 했습니다, 김신지
나는 기록하는 것을 좋아한다. 어릴 적 매년 연말 아버지께서 회사 다이어리를 받아오시면 어머니는 가계부로 사용하시면서 일상의 기록을 남기시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 한 것이 기록의 시작이다. 물론 일기도 썼지만 어머니가 몰래 보시는 것을 눈치채고는 그 이후로는 일기를 쓰지 않았고, 항상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크기의 다이어리를 들고 다니면서 기록했다.
대학생 때까지는 ‘양지사’에서 나오는 포켓형 다이어리를 주로 사용했고, 10년 전부터는 3P 바인더를 쓰다가 너무 휴대가 불편해서 몇 년 전부터는 ‘몰스킨’ 포켓 다이어리만 사용한다. 휴대도 편하고 사소한 것까지 기록하기 편해서 매년 이 제품만 사용하며 연도를 구별하기 위해 매년 다른 색상의 다이어리를 구매한다.
사람마다 기록하는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잊기 위해서 기록한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도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기에, 기억의 가치가 큰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사소한 기억을 잊을 요량으로 기록하고 그 자리에서 잊는다. 물론 훗날 내가 기록한 것을 보면 그날의 기억이 날 수도 있겠지만, 일상적인 일은 잊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그렇다고 해서 일상이 소중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일상이 모여 인생이 되기에 일상의 소중함을 모른다면 인생의 소중함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해서 일상을 소중히 여기며 일상의 사소함을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일상의 사소함을 잊으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더 가치 있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기억의 자리를 비워두는 것뿐이다.
물론 기억의 가치를 정하는 것은 나이지만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일상들도 있다. 예를 들어 군번이나 처음 입학한 대학교 학번은 아직도 기억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후 입학한 학교의 학번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해서 3P 바인더를 찾아봐야지만 학번을 알 수 있다. 20년이 넘은 일상의 기억인 군번과 첫 학번은 왜 잊히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뇌는 이 기억을 잊지 못하는 것 같다.
어떤 이는 일상의 사소함을 일기로 기록하고, 다이어리에 메모로 남기기도 하지만 나는 2년 전부터 일상의 사소함을 에세이로 적기로 했다. 주로 블로그나 브런치 스토리에 글을 써서 그날의 감정과 기분, 아쉬운 점, 기뻤던 일 등을 쓰는데 한 번씩 예전에 적은 글을 보면서 추억에 잠기거나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 다시 돌아보기도 한다.
디지털 형식의 기록도 매력이 있지만, 나는 아직도 종이 위에 기록하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특히 감정코칭 전문가 2급 과정을 배우면서 매일 감사 일기를 쓰고 있는데, 그중 다행 일기는 그날에 있었던 일 중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것 두 가지를 적는데 요즘은 달리기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아내도 요즘 내 블로그를 보면서 책 읽기에서 달리기로 전향했냐며 물어보기도 했지만, 달리기는 하나의 글감일 뿐이다. 매일의 글쓰기를 지향하는 나에게 달리기는 매일 한 개의 글을 쓰게 하는 이유이자 원동력이다. 아직 달리기가 익숙하지 않아 퇴근 후 극도의 피로가 몰려와서 책을 읽고 글쓰기를 못하는 날도 있지만 매일 책을 읽는다.
하지만 책을 읽고 바로 글을 써야 책 내용도 기억하고, 책을 읽으면서 하려고 했던 말도 떠오르는데 며칠 후에 글을 쓰려고 하면 다시 책을 찾아봐야 하고, 어떤 말을 쓰려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아 한참을 멍하게 있을 때도 있다. 그래서 무엇인가 떠오르면 바로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요즘은 주로 스마트폰의 메모 앱을 이용하거나, 아니면 브런치 스토리에 제목만이라도 기록해 놓고 생각의 단편을 연결하려고 한다.
<세상의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기록하는 두 명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본 적이 있는데, 두 분 모두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기록하지만 기록이 전하는 의미가 나에게는 다르게 전달되어 의미 있게 봤던 기억이 나서 다시 찾아보았다. 물론 두 분의 기록하는 방법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록을 하는 가치를 더 크게 하기 위해서는 기억을 위한 기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가계부부터 기행문 등 기록의 디테일을 보여주는 기록의 끝판왕 할아버지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일상의 사소한 것을 기록하는 습관이었다. 특히 전자제품을 구매한 날을 기록하고 얼마나 오래 사용하는지 확인하여, 다음에도 그 회사 제품을 구매하는 것은 일상에 적용하면 정말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읍의 일상기록맨 이야기는 개인의 일상을 모두 기록하는 것도 좋지만 몇 시에 용변을 보았는지까지 기록하는 것은 내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자신과 가족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마음은 좋지만, 기록하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다른 일상의 소중함을 놓치는 것은 아닐까, 또한 모든 것을 기록하려는 욕심이 앞서서 집중하지 못할 때도 있지 않을까라는 우려된다.
나는 잊기 위해 기록한다. 특히 사소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잊으려고 노력하지만 사소함을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요즘 쓰는 글도 정말 사소함에서 글감을 찾아 쓰는 일도 종종 있기에 일상의 사소함 속에서 특별함을 보려고 하는 노력을 한다. 일상의 사소함, 중요함, 특별함 등 무엇을 기록할까 결정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을 남기려는 의지가 다이어리는 스마트폰이든 블로그 든 어디에라도 기록하게 만들고, 이 행동이 반복되면 기록의 습관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러한 기록의 습관은 삶의 가치를 더욱 크게 하고 일상의 사소함을 더하면서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기록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 김신지 / 휴머니스트 / 2021
작가의 다른 책
제철 행복
https://brunch.co.kr/@ilikebook/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