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타이밍

불꽃과 재 속의 작은 불씨(하), 이소현

by 조아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동생이 중학교 입학 후 갑자기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어보다 영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일부러 당시 한인들이 많지 않았던 미국 동부의 필라델피아로 이민을 갔고, 일이 년 정도 편지를 교환하다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느 날부터 연락이 끊어졌다.


지금도 가끔 동생이 생각나기도 하면서 결혼은 했는지, 아이는 있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SNS 통해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는 없었다. 요즘은 내가 블로그와 브런치 스토리를 제외하고 SNS를 하지 않아 더욱 서로의 소식을 알 수 없겠지만, 미국이 아니라 그 어디에서도 자신만의 삶을 살기를 바라며 건강하게 지내기를 소망한다.


미국으로 이민 간 동생에서 편지를 쓸 때마다 나도 미국으로 유학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고, 어린 마음에 미국 유학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지도 모르면서 부모님의 고혈을 짜내 영어 회화 학원만큼은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도 빠지지 않고 다닐 정도로 영어 회화에 목숨을 걸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약 6년간 다는 학원에서 준 수료증이 그때 나의 열정을 대변해 주기도 하지만 지금은 본가 책장 어딘가에 그저 보관되어 있을 뿐이다.



이후 홍정욱 님의 <7막 7장>이란 책을 읽으면서 부모님의 도움 없이 내 힘으로 유학을 가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대학교 입학 후 유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알게 된 이후 현실적인 타협을 했다.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유학의 꿈을 접고 한국에서의 공부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나 모임에서 유학이나 해외 대학으로 교환 학생을 다녀온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때 내가 무엇 때문에 해외 유학의 꿈을 접었는지 생각해 보아도, 그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다. 부모님께 부담을 줄 수도 없었고, 유학의 명확한 목적 없이 남들이 가니까 나도 가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는 느낌이 나기는 하지만 이것 또한 정확하지 않다. 나 스스로 유학의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포기한 것이라 생각한다.


유학을 위해 영어 회화를 꾸준히 한 덕분에 세계 어디를 가든 기본적인 영어를 구사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해외에서 영어로 대화하는 나를 본 아이가 “아빠 영어 잘한다”라고 칭찬해 주기도 했지만, 아이는 기초적인 단어 외에는 영어를 할 줄 모르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도 매년 초 올해의 목표를 적을 때 영어 공부는 항상 포함될 정도로 나에게는 의미 있는 과업이다.



‘아메리칸드림’이라는 자신의 꿈을 찾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 간 지현에게 자신의 유학 생활을 도와주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속에서 화려한 불꽃과 같은 사랑을 꽃피우기도 했지만 애초부터 지현과 투야는 이어질 인연이 아니었다. 유학 생활이 너무 외로워 그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의미 없는 연애를 하는 것에도 찬성하지 않지만, 결말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까지 만나온 정 때문에 연애를 지속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유학 생활 중 나에게 힘이 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운이 좋다고 나와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을 만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평생 함께 할 사람은 자신보다 나를 더 생각하고 내 입장과 선택을 존중하며, 나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서로 상처만 주는 만남을 지금까지 만나왔다는 시간이 아쉬워, 홀로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만남을 지속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나도 과거 연애 초기 나와 맞지 않다는 것을 진작에 눈치챘지만, 헤어지게 되었을 때 주변의 시선과 평가가 두려워서 의미 없는 만남을 이어가다, 인생 최악의 만남이 되게 한 어두웠던 시간이 있었다. 친구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정말 인생의 쓰라린 흔적과 처참함만 남을 뻔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토록 결혼하고 싶어 무조건 연애하면 결혼한다고 어리석게 생각했던 그때는 내 인생의 때(타이밍, timing)를 몰랐다. 아니 알지 못했다. 나의 때는 내가 노력한다고 미리 오거나 늦춰지는 것이 아니라, 그때가 언제인지 기다렸다가 그때가 오면 행동하는 것이 최상의 시나리오다.


“인생은 한 편의 연극과 같다”라는 말처럼 무대 위에서 내가 주인공이 되어 펼쳐지는 시나리오처럼 진행되는 인생은 없다. 사람 일은 모르는 것처럼 당장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때를 기다리며 준비하고, 그때가 왔을 때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항상 깨어 있어야 함을 느낀다.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이 묵묵히 곁에서 힘이 되어주며, 도와준다는 것을 모르고 있던 지현은 드디어 자신의 동반자를 만난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현실로 이루며 미국의 중부 도시, 아칸소에서 시작된 꿈을 미국 서부를 거쳐 동부 뉴욕에서 화려하게 펼친다.



꿈을 위해 떠난 유학 생활 중에서 어떤 것을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해하고 있을 때, 지현이 잘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한 번 도전해 볼 것을 추천했던 사람은 그저 단순한 관심으로 지현을 바라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현이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을 도와주며 힘을 되어주는 것이 자신의 행복임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투야와의 사랑이 화려한 불꽃이었다면 주만은 항상 지현의 곁을 말없이 지키며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처럼 화려하게 타오를 때를 기다렸다고 생각한다. 지현이 꿈을 포기하지 않고 패션의 도시, 뉴욕에서 전시회를 했던 것처럼 주만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꿈을 이룰 수 있는 때를 기다렸기에 지현보다 지현의 꿈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늘 자신의 곁에서 힘이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심지어 그런 축복을 누리고 있음에도 축복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보다 나를 믿고 지지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 마음이 서로 통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라고 믿는다.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이런 축복을 전할 수 있는지 나에게 질문하며, 내 삶 속에서 관계의 축복이 넘쳐나도록 때를 기다리며, 그때가 왔을 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는 판단력과 결단력을 키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불꽃과 재 속의 작은 불씨(하) / 이소현 / 좋은땅 /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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