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앤나 Nov 03. 2020

세상을 훔쳐온 것을 파는 ‘도둑시장’

포르투갈 언덕을 오르면 펼쳐지는 세상

  

"앞을 볼 수 있다면 무엇이 하고 싶은가요?"

"남의 물건을 훔치고 싶어요. 그 기분을 알고 싶어요."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중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이들이 훔쳐온 풍경이 있다.

포르투갈, 도둑시장.     




여느 도시가 그렇듯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 역시 유명한 시장들이 많다. 풍부한 먹을거리로 관광객의 발길을 끄는 리베이라 시장, 19세기 공장 단지가 문화공간이 된 엘엑스 팩토리(Lx Factory) 플리마켓 등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유명한 곳은 도둑시장이다.     


무려 13세기부터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시장은 도둑들이 장물을 거래하며 시작되었다고 해서 도둑시장(Feira da Ladra) 으로 불린다. 골동품에서 흔히 보이는 벼룩이라는 뜻의 'Ladro' 글자가 기원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더 믿음이 가는 것은 전자다. 세계 각국의 수집가들이 찾아올 만큼 희귀하고 흥미로운 물건들이 널려있는데, 그야말로 어느 집의 장롱 속 물건이 아니고서야 볼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건이 아닌 갖고 있던 사람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지고야 마는 것들이 있다.     


“당신은 산책을 하기 위해서나 커피 한잔을 마시기 위해, 아니면 양말 한 짝이나 사야겠다는 생각으로 그곳에 갈 수 있지만, 당신 손에 들려올 것은 80년대 코트와 Fado 레코드, 절대 사용하지 않을 녹슨 망치일 것이다.” 라던 한 여행가의 경고가 섞인 당부를 기억하며, 큼지막한 에코백을 어깨에 둘러매고 나섰다.      



Lisbon, Portugal.


도둑시장은 알파마 지구에 있다. 리스본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 알파마. 1755년, 단 6초로 리스본을 잿더미로 바꿔놓은 대지진에도 살아남은 언덕 위 동네. 그래서일까. 알파마를 걸으면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트램과 자동차와 자전거까지 모조리 지나가는 좁고도 정신없는 골목의 한가운데에서조차 안심이 되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것처럼 보여도 결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달까. 게다가 발을 딛고 선 돌바닥조차 다른 곳보다 단단한 것 같다. 더 많이 밟는다고 단단해지는 건 아닐 테지만, 어쩐지 그렇다.     


바래고 낡은 색, 그러나 마음에 들 것이다. 이 동네가 품은 이야기가.

  

도둑시장으로 오르는 길은 아, 정말로 가파랐다. 시간을 거슬러가기라도 하듯 그 여정은 멀고 높았으며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이 시간이 특별해지는 이유는 함께 걸어가는 -모르는- 사람들과 서로 마주 보게 된다는 것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거나, 휴우 한숨을 쉬기도 하지만 그 끝에는 언제나 너털웃음을 주고받는다. 어쩌겠어, 리스본인데. 라는 의미일까.     





시장에 도착하니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온다. 아직 이른 오전인데도 이곳을 가득 메우는 인파와 끝없이 펼쳐진 물건들이라니. 도무지 오늘만 열리고 사라질 풍경처럼 보이지 않는다. 마치 어제도 그래왔던 것 모습이다. 시장이 아닌 동네로, 언덕배기를 닮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흘러나오는.      



입구나 시작하는 지점이 따로 없어서 엉거주춤하게 서 있다 보면 갈 곳을 알게 된다. 시선을 잡아끄는 곳. 그리고 나서는 그 옆으로, 아래로, 모퉁이로 자연스레 걸어가면 된다. 물건은 어떤 범위나 주제별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데, 이 어마어마한 것들을 나누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지 싶다. 오래된 필름 카메라, 중고 가구, 커피잔과 커트러리, 정장과 넥타이, 낡은 회중시계, 레코드, 앤틱 소품, 각종 액세서리, 처음 보는 군용 물품과 눈을 가늘게 뜨고서 발행연도를 찾게 되는 지폐와 서신까지.      


물건들이 널려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인데, 여느 테이블 위가 아니라 담요 위에 펼쳐있거나 헌 상자 안에 들어가 있기도 하다. 더러는 급한 대로 들고 온 것처럼 보이는 그릇이나 바구니 안에 담겨있어서, 도통 어디까지가 파는 물건인지 알 수 없기도 하다.      



끝없이 펼쳐지는 장면을 걷는다. 물건이 꺼내놓는 저마다의 사연과 구경꾼들의 오고 가는 이야기 속에서 여러 생들을 마주치고 그래서 오래 머물거나 끝내 떠나기도 한다. 그 물건을 고르고, 아니 때로는 고르는 모습을 더 많이 바라보면서.     


이쯤이면 다 본 걸까, 싶을 때쯤 나타나는 모퉁이는 어김없이 새로운 장면으로 이끈다. 신발 한 짝. 담요 위에 올려진 한 짝의 신발이라니. 고개를 휘휘 돌리며 나머지 한 짝의 위치를 찾다가 이내 ‘그래, 이곳이라면.’ 해버렸다. 이곳이라면, 한 짝만 사는 사람도 있을 테지. 가파른 언덕을 올라오면서 아슬아슬하게 닳았던 밑창이 튿어졌다거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사정상 한쪽만 필요한 이도 있을 것이고, 그림을 그리거나 장식을 위해 필요하기도 할 테니까. 집집마다 다르게 물건을 쓰는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시장에서는 신발조차 여러 모양새가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누군가의 이름이 적힌 상장이나 명패는 대체 무슨 이유로 산단 말인가. 그러나 나의 하찮은 상상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줄거리가 아늑히 서려 있을지도 모른다. 어린아이의 신발을 주제로 오직 여섯 단어의 소설을 만들어 냈다던 이야기처럼.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팝니다아기 신발사용한 적 없음


여기 이곳에 팔리기 위해 놓여진 이야기를 안다면, 소설 아닌 것이 어디 있을까.     






주방용품을 쌓아둔 곳에서 매끄럽게 반짝이는 레몬즙 짜개는 에쿠니 가오리의 추억을 불러온다. 그녀의 할머니가 젊은 시절 좋아하던 남자에게 선물을 받았다던 레몬즙 짜개. 그것은 만들어진 용도와는 다르게 귤을 짤 때나 쓰였는데, 그 밍밍하고 달큰한 즙은 어린 그녀의 입맛에 꼭 맞았다고 했던가. 새초롬한 모양새로 짜내는 진득한 달콤함은 한 여인이 나이를 들어가는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내게도 레몬즙 짜개가 있다. 세상을 떠나신 이모가 오래전 낯선 나라에서 신혼살림을 차리며 샀던 것이라고 했다. 얼마나 생경했을까. 시장에 들어서면 밀려드는 낯선 싱그러움에 그녀는 어떤 알싸함을 느꼈을까. 엄마의 주방에서 레몬즙 짜개를 받아온 것은 쓸모의 이유는 아니었다. “이거 쓸래?”라거나 “필요하면 가져가도 좋아.”가 아니라 “이 레몬즙 짜개는 말이지” 하며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 듣고 나면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레몬과는 전혀 상관없는 레몬즙 짜개로 역할을 해내게 되는 것이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이 희귀하고 별거없는, 마치 서랍장을 쏟아놓은 것 같은 시장을 찾아오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들은, 그들의 물건을 찾고 있는 것이다. 오래전 서랍에 넣었다가 사라져버린, 분명히 소중해서 넣어두었는데 잃어버린 물건들을.     



열쇠, 지갑, 장갑, 녹음기, 우표와 카드... 살아오면서 도둑을 맞은 것들이 있었다. 한 발자국을 뗄 때마다 잃어버렸던 것들이 나타났다. 모든 물건은 그것을 다루는 사람으로 존재했다. 사람마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달라지듯, 그렇게 물건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났다. 유행에 맞지 않아, 또는 누구를 떠나보내며, 새로운 곳으로 가기 위해, 나는 얼마나 숱하게 버려왔던가. 물건을 버렸다고 생각했지만그것들은 조금씩의 나였다저마다의 이유로 버리고 나니 이제는 이야기가 없는 물건들만 남아있었다. 꼭 판매를 위한 전시장처럼, 나의 삶은 그런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거나 어느 부분이 헤졌다는 이유라니, 나 또한 늙어가지 않던가. 나는 나에게서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삶에서 어떤 것을 소중히 여기고 아쉬워하고 있을까.     



아까부터 눈에 밟히던 것이 있었다. 우표가 붙여진 엽서. 시장 곳곳에서 봤지만 굳이 들춰보지는 않았다. 이토록 신기한 물건들이 차고 넘치는데 고작 엽서라니. 너무 시시하지 않은가. 게다가 우표도 붙여지고 받는 이도 이미 적혀있는 엽서를 누가 산단 말인가.     


볼 것이라고는 글씨뿐인, 읽을 것이라고는 몇 글자뿐인. 어쩌면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적혀있나 싶어서 인심 쓰듯 집어 들었다. 낯선 나라의 글씨를 읽지 못하는 나를 눈치채고는 슬쩍 내용을 들려준다.     


-잘 도착해서 직업을 구했다는 이야기군요.

-누구한테요?

-가족에게죠. 안부 편지랄까.     



파리에 도착해서 직업을 구했다는, 그녀 혹은 그의 이야기가 못내 궁금해졌다. 이 편지는 어쩌다가 먼 곳에 오게 되었을까. 가족들은 편지를 받았을까. 그렇다고 해도, 아니라도 한대도 애틋한 건 매한가지다. 이미 받은 편지라면, 받고 나서도 버리지 않아 수백 년 후의 시장을 서성이는 나의 손에 들려있으며, 받지 못한 편지라면 사람들은 자신의 것도 아니면서 거참, 하며 오랫동안 보관하고 있던 것이니까. 정말이지 자신과 상관없는 편지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마치 전해줘야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해도 전해줘야 할 중요한 것처럼.          

“편지는 고스란히 전해졌다.”           


옷, 가방, 카메라, 장신구, 크고 작은 소품들 모두 시대가 변하며 모습도 함께 달라졌지만 편지는 유일하게 그대로였다. 오랜 시간이 흘러가도 헤지지 않고 촌스럽지 않은 모습으로, 담담하게. 변할 필요 없다는 듯이. 인생에는 변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있었다. 처음부터, 거기에 그대로 의미였던 것들이.      


물건도, 예술도, 무엇도 아니라서. 필요한 기능과 덧붙일 아름다움조차 없이 종이와 글씨만으로 충분한 것이. 마음을 적어내고 진심을 담아냄으로써 모자람이 없는 것들이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들만 챙겨오느라 떨구고 온 편지 몇 장이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     


의미를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색깔은 편지를 닮았을 것이다. 의미의 보호색을 닮아 쉽게 잊고 오래 간직하는 편지, 그 색깔을.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봐야 하는 세상이 있었다. 눈이 있어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눈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느껴야 하는 세상도 있었다. 한 공간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 오직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라면, 보이는 것으로만 채우려고 할 것이다. 물건도, 사람도, 인생도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았다. 내가, 나의 모습으로만 설명될 수 없듯이. 볼 것 없는 편지가 볼 것 있는 편지가 되는 순간, 시장을 채우는 장면도 달라졌다.     


편지를 샀다. 글자를 보는 게 아니라 읽듯이, 세상도 읽을 수 있기를 바라며. 그리고 또 무엇을 사야 할까. 지금이 아닌, 그 어느 시간을 사기로 했다.     


언젠가 오늘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줄 누군가를 위한 선물을 샀다. 오래전 나의 날들에 당신이 있었다고. 당신이 볼 수 없는 무수한 날들 어딘가에서도 당신의 기억은 만들어지고 있다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날들은 당신을 만나러 가고 있다고, 조금 더 고운 기억을 만들고 있을 거라고. 그러니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느껴달라고, 서로의 시간과 인생에서 뜻밖에 기쁘게 마주치게 될 날을 기다려보라고. 시간의 질감을 닮은 보드라운 팔찌를 건네면서.     


어떤 그림이 그려져있는 것으로 골랐을까


세계의 도둑들이 훔친 것을 파는 시장이 있다면, 그곳엔 무엇이 있을까. 예술 작품이나 장인의 물건, 한정판과 시대를 반영하는 것들. 이것들은 모두 의미가 있는 것들이다. 존재의 이유가 쓸모가 아니라 의미인 것들. 마치 한 사람처럼. 우리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우리이기에 가치 있는 것처럼. 사람을 닮은 것들 중에서, 마음에 가까운 것을 발견해야 했다.      



앞은 볼 수 있지만 마음과 시간은 볼 수 없기에, 


편지와 선물을 샀다. 남는 것은 오직 의미가 될 것이고, 오늘은 분명히 사라지지만 내일로 사라지는 것이기에. 그래서 볼 수 없는 것들의 이야기를 읽어가기 위해.     



시장을 나오면서 아줄레주 장식을 파는 그녀에게 들렀다. 시장에 도착한 나를 보고 처음으로 "Ola!(안녕)" 했던 그녀에게 꼭 어울리는 [나는 오늘 기분이 좋거든요] 한국어로 쓰인 엽서를 건넸다. 뜻을 해석해주자 그녀는 마음에 쏙 든다며 웃는다. "집에 가서 거실에 걸어둘 거야!" 언젠가, 아주 언젠가 시장에서 이 엽서를 집어 드는 사람은 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대답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날 기분이 좋았나 봐요.“     



오래된 알파마 지구를 내려온다. 가파른 언덕을 걸어 내려오며 뒤를 돌아본다. 어쩐지 다시 찾아올 때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잃어 버린지 모르고 살았던, 그러나 찾게 될 것이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오늘과 진짜가 있는, 포르투갈의 도깨비같은 도둑시장.          


조선우표라니 가격이 무려 10전이다


덧붙여 리스본 도둑시장에 대한 몇 가지 설명입니다.      

가는 방법) 저는 언덕을 모르며 몇 번이나 '내가 여기에 왜 가는거지.' 를 생각했는데요, 한 여행 사이트에서는 여름에는 언덕을 오르는 (바보같은) 결정을 하지 말라는 조언이 있더군요. 28번 트램과 버스로도 갈 수 있습니다.     

여는 시간) 이른 오전에 도착했는데도 꽤 북적였는데요. 안내된 시간인 오전 아홉시보다 더 일찍부터 연다고 해요. 대체 몇 시부터 여는지 알 수가 없답니다.     

거래 방법) 흥정-으로 보이는 대화-로 더 만족스러운 가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조언도 있습니다. 게다가 그것이 바로 그들이 기대하는 바라고도 하더군요.     



"앞을 보지 못하게 된다면 무엇이 하고 싶은가요?"

"엽서를 쓰고 싶어요."     


내 마음을 읽어주길 바라면서.

엽서가 도착하기까지 꺼내어 나르고 전해줄,

모든 이들이 읽을, 

그래서 이 사랑이 세상에 적히기를 바라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