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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먼지 시상식을 기획하며

그러니까 너무 먼지같은 날을 찾습니다.

by 유앤나

완벽한 식사 타이밍상 - 배고픔의 정점에서 먹은 그 한 끼에게

이불킥 올림픽 금메달상 - 새벽 3시 기어코 몸부림치게 만든 기억에게

샤워 중 유레카상 - 물줄기 아래서 갑자기 찾아온 인생의 답에게

몸이 먼저 안 순간상 -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본능적으로 반응한 나의 감각에게

생각지 못한 통찰상 - 택시기사님, 카페 사장님께 받은 뜻밖의 조언에게


올해 2026 종로 영감수업 시상식을 기획하며,

가장 먼지같은 날을 찾고 있죠.



먼지의 시상식




왜 우리는 평범한 하루를 기념해야 하는가

"우리는 모두 별의 먼지로 이루어져 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나오는 말은 두 가지 감정을 느끼게 한다. 하나는 우주적 경외감이고, 다른 하나는 묘한 허무함이다. 별의 먼지라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동시에, 얼마나 하찮은가.


그래서 기념하기로 했다.

마땅히 먼지같은 하루. 먼지로 마땅한 하루.

커서도 안된다. 대단해서도 안된다. 특별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아무리 작고 하찮아도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먼지의 누적이 삶을 이룬다. 별이 폭발하고 흩어진 입자들이 모여 지구를 만들고, 바다를 만들고, 결국 우리를 만들었듯이. 평범한 화요일 오후 3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목요일 저녁도, 사실은 우리의 우주를 구성하는 필수 입자들이다.


성취가 아니라 존재를 기념하는 상

특별한 시대를 살고 있다. 많은 것이 '성과'로 측정되고, 많은 날이 '생산성'으로 평가받는다. SNS를 열면 누군가는 승진했고, 누군가는 여행을 갔고, 누군가는 또 무언가를 이뤘다. 매일 새로운 일이 탄생하고, 축하받고, 결정적이며, 성공과 실패가 극적으로 나타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꾸만 묻게 된다. "나는 요즘 뭘 했지?"

대답이 "글쎄, 별로 한 게 없는데..."로 시작된다면, 마치 의미 없는 날처럼 느껴진다. 시상식은 대개 "올해의 최고"에게만 주어진다. 1등, 우수상, 대상. 그치만 대부분의 삶은 1등이 아니다. 대부분의 하루는 "우수"하지 않다. 그냥 하루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종류의 시상식이 필요하다.

완벽한 식사 타이밍상은 미슐랭 스타가 아니다. 배고픔의 정점에서 먹은 편의점 김밥 한줄이 주는, 그 완벽한 순간의 만족을 기념하는 상이다.

이불킥 올림픽 금메달상은 성공의 기록이 아니다. 새벽 3시, 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진 혼자만의 민망한 회상, 선명한 깨달음, 그 생생한 감정의 증거다.

샤워 중 깨달음상은 TED 강연이 아니다. 물줄기 아래서 문득 찾아온, 분명히 알아버린 그 순간이다. 물론 수건을 두르고 나오면 이미 절반은 증발했지만.

예상 밖의 깊은 대화상은 계획된 만남이 아니다. 택시 기사님, 카페 사장님과 나눈, 5분도 안 되는 그 짧은 교감. 우연히 만난 타인의 한 마디가 당신의 하루를 바꿨다면, 그것은 기적에 가깝다.

신인 배우상은 우리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춤추고, 혼잣말하고, 웃고, 울었다는 것을 기념한다. 카메라가 없어서 아쉬운 게 아니다. 카메라가 없었기에 가능했던 그 순수함 혹은 솔직함이 아름다운 것이다.


먼지의 누적이 별을 만든다

올해 나는 몇 번이나 "의미 있는 일"을 했을까? 세어보면 손에 꼽을 정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배고픔의 정점에서 먹은 밥의 횟수, 샤워하면서 문득 떠올린 생각의 횟수, 새벽에 잠 못 이루고 이불을 걷어찬 횟수, 누군가와 예상치 못한 대화를 나눈 횟수를 세어본다면?

아마 셀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맞다. 삶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먼지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학자들은 말한다. 별이 죽을 때 폭발하면서 흩뿌린 먼지들이 우주를 떠돈다고. 그 먼지들이 모여 새로운 별을 만들고, 행성을 만들고, 생명을 만든다고. 그 과정에는 수십억 년이 걸린다.

우리 삶도 그렇다. 오늘 하루는 먼지처럼 보일지 모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그 먼지가 없다면 우리, 당신과 나라는 별은 존재할 수 없다.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일상의 순간들에 상을 주는 이유는, 그것들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그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 숨 쉬었다는 것. 배가 고팠고, 먹었고, 배가 불렀다는 것. 누군가를 생각했고, 누군가가 우리를 생각했다는 것. 웃었고, 울었고, 화냈고, 평온했다는 것. 잠들었고, 깨어났다는 것.

이것들은 성취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삶 그 자체다.


상을 받는 날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상을 받기 위해 수 년간 반복한 평범한 실험과 도전의 오후들이 없었다면, 상은 결코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결혼식도 물론 특별하다. 하지만 그 전에 함께 걷고, 함께 밥 먹고, 함께 침묵했던 수백 번의 평범한 저녁들이 없었다면, 그 결혼식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모든 드라마틱한 순간은 드라마틱하지 않은 순간들의 누적 위에 선다.


그러니 오늘도 시상식을

올해가 저물어간다. 아마 스스로에게 물을지도 모른다. "나는 올해 뭘 했지?"

그때, 부디 "별로 한 게 없는데..."라고 대답하지 말기를.

우리는 365일을 살았다. 아침마다 눈을 떴고, 커피를 마셨고(혹은 차를 마셨고), 출근했거나 출근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만났거나 혼자 있었고, 좋은 날도 있었고 나쁜 날도 있었다.

그 모든 날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샤워 중 깨달음상은 우리가 여전히 질문하고 있다는 증거다.

잠들기 직전 아이디어 증발상은 제대로 휴식할 줄 안다는 증거다.

몸이 먼저 안 순간상은 우리 안에 직감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예상 밖의 깊은 대화상은 매일, 매순간 타인과 연결될 수 있다는 증거다.

신인 배우상은 우리가 웃고, 울고, 솔직하고, 생생하다는 증거다. (그래 우리는 여전히 사랑스럽다)


이것이 바로 연말 시상식의 의미다.

성취가 아니라 존재를 기념하는 것.

특별함이 아니라 평범함을 축하하는 것.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우리는 모두 별의 먼지다

우주가 137억 년 동안 먼지를 모아 별을 만들었듯이, 우리는 365일 동안 먼지 같은 순간들을 모아 한 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니,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전부다.


올해 마지막 날, 스스로에게 상을 주자. 거창한 이유가 필요 없다. 살아있었다는 것만으로, 이미 수상자다.

그러니 내년에도, 계속해서 먼지가 되자. 평범하고, 소소하고, 때로는 하찮아 보이는 그 순간들을 모으자.

언젠가 멀리서 보면,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별이었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P.S.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여기까지 읽으며 떠올리고, 미소짓고, 회상하고, 뭔가를 바라는 그래서 ‘희망을 만들어낸 상’을 수여해 드립니다. 이 짧은 시간에 만들어 낸 희망을 기억하길 바라며 올해도, 내년에도, 당신의 모든 먼지 같은 순간들이 빛나기를.



화면_캡처_2025-01-04_224006.png 내년 먼지 시상식, 같이 할까요?


2025년 시상식이 궁금하시다면, 여기에 있답니다.

https://blog.naver.com/sweetmeen/223714855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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