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정신 질문, 뭐했냐는 말 대신 필요한 것

연말이 되면 성찰을 강요당한다.

by 유앤나

연말이 되면 서로 묻는다.

"올해 뭐 했어?"

그리고 우리는 그 중에 가장 대답할만한 것, 보여줄만한 것을 골라서 대답한다.

도전했던 것, 성과를 얻은 것, 아쉬웠던 것, 그래도 아주 초라하게 끝나진 않은 것.





연말이 되면 성찰을 강요당한다.

올해의 성과, 내년의 목표, 더 나은 나.

왜 우리는 왜 삶을 '더 나아지는 것'으로만 정의할까?


롤랑 바르트는 일상의 반복을 "미토스mythos"라고 불렀다. 신화처럼 반복되는 것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지하철을 타고, 컴퓨터 앞에 앉는 행위. 이것들은 생산성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반복 속에 삶의 실체가 있다. 우리는 성취가 아니라 반복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칼 세이건은 우주를 바라보며 다른 방식으로 같은 것을 말했다. 지구는 광활한 우주에서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에 불과하다고. 그 작은 점 위에서 우리가 이룬 모든 성취, 권력, 영광은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티끌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지만 이것을 허무주의로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작은 점 위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경이롭다고 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한 해를 프로젝트로 취급한다.(실은 내가 그렇다) 자기계발, 목표 달성, 성과 측정. 삶은 마치 완성해야 할 과제처럼 변했다. 하지만 삶은 완성되는 게 아니라 진행되는 것이다. 바르트식으로 말하자면, 삶은 "되어가는 것devenir"이지 "이루는 것réaliser"이 아니다.


연말의 성찰이 폭력적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결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올해 우리는 얼마나 성장했는가? 무엇을 이뤘는가? 하지만 이 질문은 이미 전제를 깔고 있다. 삶은 측정 가능해야 하고, 발전해야 하며, 증명되어야 한다는 전제.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성찰이 아니라 관찰이 아닐까. 성찰은 평가하기 위해서지만, 관찰은 그저 바라보기 위해서다. 올해 무엇을 이뤘는가가 아니라, 올해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는 것.


바르트는 사진을 분석하며 "푼크툼punctum"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보는 이를 찌르는 디테일. 삶도 그렇다. 우리가 기억하는 건 큰 성취가 아니라 작은 순간들이다. 친구와 나눈 웃음, 창밖으로 본 노을, 우연히 들은 노래. 이것들은 목표 달성 리스트에 없지만, 삶을 삶이게 만든다.


창백한 푸른 점을 보며 느낀 건 허무함이 아니라 연민이었다. 그 작은 점 위에서 전쟁하고, 미워하고, 경쟁하는 우리가 안쓰러웠던 그는 말했다. "우리 서로에게 더 친절하자."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똑같이 소중한 티끌이니까.


연말에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뭘 이뤘는가"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였는가"일지 모른다. 어떤 순간들을 느꼈는가, 어떤 반복 속에서 살았는가. 올해 나는 회사 다니고, 밥 먹고, 일했고, 아팠고, 고민했다. 성취가 아니다. 삶이었다. 그리고 이런 무수한 삶들이 나를 보호하고, 응원하고, 안아줘서 역시 또 그 삶들에 있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나는 당신이 존재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에게 해줘야 할 말도 이것이다.

더 나은 스스로가 아니라, 존재하는 스스로를 원한다고.

성장하는 나가 아니라, 얼만큼 어디까지 살 수 있는 우리가 되어가는지 지켜보자고.


연말은 결산의 시간이 아니라 확인의 시간이어야 한다. 우리가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것. 우주의 작은 점 위에서,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내년에도 나는 회사 다니고, 밥 먹고, 잠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삶일 것이다. 측정할 수 없는, 증명할 필요 없는, 다만 진행되는 삶. 그리고 또 이런 작은 창백한 푸른 점 위의 작은 반복들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삶. 소중하게 나타났다 특별하게 사라져주는, 삶. 그것이 우리의 존재 방식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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