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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앤나 Apr 18. 2016

분홍색 립스틱

그대가 남긴 에세이, 그래서 적는 수필_ 05



오늘 분홍색 립스틱을 샀다.

너무 연하지도 지나치게 진하지도 않은

맑은 색의 립스틱.

15년도 더 늦었지만,

여자이며 누군가의 딸인,

그녀에게 선물하기 위해.


몇 주 전, 엄마는 책을 읽고 나는 그 옆에 기대듯 누워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익숙한 편안함에 잠이 들려고 했을까, 잠깐 졸았을까. 엄마의 나지막한 혼잣말이 들려왔다. "친정엄마가 있는 사람들은 좋겠다." 순간 멍해졌다. 아무렇게나 펼쳐진 손에 닿을 것 같은 엄마의 무릎 언저리가 멀었다. 방금까지 지루하게 편안하던 공기가 낯설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티가 나지 않게 고개를 돌려 엄마를 쳐다보았다. 찬찬히 살펴보자 어느 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엄마도 여자라는 생각까지는 그 언젠가 했었다. 그렇지만 딸이라는 생각은 왜 하지 못했던 것일까?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지 어느덧 15년. 그 날 이후로 엄마는 더욱이 '엄마'일 뿐이었다. 그리고 머잖아 내가 결혼을 해 아기를 낳게 된다면, 엄마와 외할머니, 이 두 존재만이 될 것이었다.


친정엄마가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고, 엄마를 그리워하는 엄마는 딸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깊어진 눈가 주름 너머 초롱하게 반짝이는 눈빛이 보였다.

검게 염색한 머릿속 드문드문 난 흰머리는 탐스럽게도 건강했다.


그 예전부터 엄마는 내게 온전히 '엄마'였다. 12살, 처음으로 생신선물로 립스틱을 샀다. 동네의 작은 화장품가게에 가서 "어떤 색을 줄까?" 묻는 아주머니께 난 잠깐의 고민 끝에 "갈색이요." 라고 말했다. 분홍색은 젊은 언니들이 바르는 것이니 엄마에겐 갈색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때 갓 40이 되었던 엄마는 선물을 받고 환히 웃으셨고, "정말 예쁘다." 하셨다. 그 후로도 이따금 립스틱 선물을 살 때 마다, 차분한 갈색 혹은 연한 코랄색이었다. 쉰, 그리고 예순을 바라보는 연세에 어울리는 색은 나도 점원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매 번 ‘잘 골랐다.’고 생각했고 그녀 역시 말했다. “어머니도 좋아하실 거에요.”   


“엄마가 보고 싶다.”


그 말은 30년간 나의 엄마가 아닌 60년을 산 딸이 한 말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어느 집안의 참 예쁜 셋째 딸을 발견한 것이다. 원래부터 그 곳, 그 자리에 있었지만 보이지 않았던. 아니 내가 바라보지 않았던 그녀를 이제야 바라본 것이다. 펼쳐두었던 손을 조금 더 뻗자 그녀의 옷자락이 만져졌다. 익숙한 촉감이었고, 공기는 다시 나른해졌다.

분홍색 립스틱을 예쁘게 포장해달라고 하며 지난 15년간 엄마를 그리워했을 엄마에게 미안했다. 나는 당신의 품에서 딸로 충만한 사랑을 받고 있어서. 그리고 여자인, 딸인 당신에게 어머니의 모습만을 바라봐서.

선물을 받고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상상을 해본다. 꽃같은 색과 함께 더 아름다워질 얼굴도.


가장 예쁘다는 셋째 딸,

그녀에게 어울릴 맑은 

분홍색 립스틱이 매끈하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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