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서점에서 펼치는 파리의 낭만
헤밍웨이가 사랑한 서점
파리 생제르망 길가에는 오래된 서점이 있다. 평범해 보이는 이 서점은 지금껏 읽어왔던 소설보다 더 사랑스럽고 아련하며 무언가가 그리워질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낡은 책장에 기대어, 오랫동안 꽃혀 있던 책을 꺼내는 순간 펼쳐질 소설 같은 이야기를.
셰익스피어앤드컴퍼니는 1900년대 초반 실비아비치라는 여성이 운영을 했으며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비롯한 복회귀선의 헨리 밀러, 거투르드 스타인, 에즈라 파운드, 오스카 와일드, 제임스 조이스, 스콧 피츠제럴드에 이르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찾던 서점이었다. 단지 책을 사거나 파는 공간이 아닌, 작가들이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도록 지원해주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도 실력은 있지만 형편이 넉넉지 않은 작가지망생들을 위해 에세이 한 편으로 심사해 지원하기도 한다니, 이처럼 매력적인 서점이 또 있을까. 실제로 해밍웨이가 젊은 시절 파리에 살았던 때에 쓴 에세이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읽으니 이 서점에서 책을 마음껏 빌려갈 수 있다는 말에 기뻐하던 내용이 나오기도 했다.
“헤밍웨이 씨, 지금의 수입 액수에 너무 연연하지 마세요. 중요한 건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잖아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단편을 써도 사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파리는 날마다 축제 中 (헤밍웨이가 젊은 날, 파리에 7년을 살았을 때 쓴 에세이)
글, 사랑 그리고 인생에 서툴렀던 그들의 초라한 낙원, 이 서점에서 그들은 어떤 책을 빌렸을까. 어느 이야기로 위로를 받고, 어떤 문장을 오래도록 기억했을까.
그 곳에는 그날, 그 청춘에 공감하던 우리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의 추억이 있는 곳이라면, 그들을 아낀 우리의 기억도 묻어 있을 테니까. 그래서 향했다. 파리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곳, 생제르망 길가의 오래된 서점으로. 낡은 책장에 꽃힌 우리의 기억을 꺼내기 위해.
아주 흔한, 그러나 전부인 이야기
그곳에는 서툴고 투박한 이야기들이 있을 것 같았다. 이 사랑을 받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구나 환희를 느꼈다가, 처음 겪는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아파야만 했던. 마음이 같아 가여웠고, 너무나 초라했지만 가장 빛났던 그 날의 이야기들. 여느 사랑 줄거리와 다르지 않은 그런 흔한 소설, 나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가 있는 오래된 서점.
그 곳에 닿기를 꿈꾸며 편지를 썼다. '이 곳에 도착해서 편지를 전해주게 되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정말로 오고 싶었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이 서점을 기억하며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해 가는 것처럼 이 곳도 더욱 행복해지기를 바랄게요.' 서점에게, 혹은 아주 오래전 머무르며 지금의 낡고 빛나는 공간을 만들어준 그들에게.
그곳에 갈 수 있는 기회는 아마도 지금뿐이니까. 그리고 보통의 서점이라면 의미 없는 편지로 남을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도 재능은 있지만 형편이 어려운 작가들을 후원할 때 에세이 한 편으로 심사를 할 만큼 진심을 읽어낼 수 있는 서점이니까.
편지에 적힌 흔한, 그러나 전부인 진심을 읽어줄 수 있을 곳이라고 믿으며.
가장 닿기를 원했던 작은 공간
반짝반짝 빛이 나서 내일이면 파리를 떠난다는 것이 슬펐던 날, 센 강변을 따라 걸으며 시테섬에 있는 한 서점에 도착했다. '막상 가면 작은 서점일 뿐이에요.'라는 후기들을 애써 부정했지만 마음 한켠에 걱정스레 남겨둔 나를 보란 듯이 너무나 아름다운 공간에.
서점 앞에 놓인 낡은 책 수레에는 숱한 이야기들이 쌓여 있었다. 네가 좋아할 그 어느 시대의 역사책, 내 마음에 든 화사한 그림책, 달달한 내용이 틀림없을 핑크빛 표지를 두른 책. 그리고 아주 낡아서 볼품없어 보이는 책까지.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받으며 드디어 서점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그들의 초라한 낙원에 닿았다.
상상하던 서점이 있다면 여기일까. 서점 내부에 들어서면 오래된 책 냄새와 독특한 책 선반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2층에서 연주되는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던 순간 그 곳에 멈추어 서고 말았다. 그리고 오래도록 그곳에 기대서 책 대신 어느 기억을 꺼내어 보았다. 그때쯤 알게 되었다. 이토록 먼 곳, 파리에서 이 작은 서점에 닿기를 바란 이유를.
Be not inhospitable to strangers
Lest they be angels in dusguise
낯선이에게 친절하라. 그들은 변장한 천사일지도 모르니.
서점의 모토인 메시지가 곳곳에 적혀있다. 그리고 눈에 들어왔다. ‘파리’라는 온통 로맨틱한 도시에서, 작은 서점을 찾아와 오래도록 머무르고 있는 여행자들이. 그들의 가슴에는 어떤 기억이 있을까. 이 먼 곳에서 만난 우리는 어떤 점이 닮아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찾아낼까.
변장한 천사, 또 한 명의 헤밍웨이들 틈에서 미래의 소설 속 배경이 될 현재의 순간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제는 현실로 나가야 할 시간. 첫 눈에 들어왔던 어린왕자 책과 엽서를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작고, 볼품없는 편지도 함께 들고. '아, 편지는 조금 오그라들잖아. 그냥 가만히 있을까 봐.' 다시 오지 않을 순간에도 바보 같지만 참 나다운 생각을 하며, 쭈뼛거리며 편지와 함께 건넬 작은 한국 기념품을 가방에서 꺼냈다. 그리고 돈과 함께 쥐고 있다가 드디어, 건넸다
믿어보기를, 파리의 마법을
편지를 받고 깜짝 놀란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앤드컴퍼니 에코백을 선물로 건넸다. 이런 편지는 처음 받아본다며, 글자를 찬찬히 되읽는 그녀가 고마워 마음이 벅찼다. 어떻게 잘 전해줄 수 있을까만 고민했지 나 역시 무언가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 했으니까. 그래서 한 번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여행자는 조심스럽게 부탁했고,
서점은 어김없이 따뜻했다.
마치, 여행자의 본래 모습이 천사라도 되는 듯이.
그렇게 셰익스피어앤드컴퍼니에서 추억을 기록했다. 파리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오래된 중고 서점, 예술가를 사랑했고 예술가들이 위로받았던 초라한 낙원, 내부는 촬영이 금지되어있어 많은 사람들이 몰래 찍어온다는 공간, 허락해준다면 함께 머물렀던 시간을 담고 싶었던 순간.
여행자는 편지로, 서점은 사진으로 서로에게 기억이 되었다.
파리의 곳곳에서 만난 가난한 추억들은 곧 나의 청춘을 떠올리게 했다. 투박한 진심은 소망으로 변모했고, 서툰 날들은 반짝이는 기억이 되었다. 그렇게 떠올렸다. 여전히 잊지 못하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는 것들에 대해. 그리고 믿고 싶어졌다. 파리에 있는 동안은 꿈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그리고 어쩌면 현실이 될 수도 있다고. 파리를 사랑하는 만큼, 기억을 잊지 않는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