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하나 글쓰기 챌린지 30일, 여섯째 날
아빠는 20년을 몸 담았던 <좋은 직장>을 퇴사하곤 10년 전 <네트워크 마케팅>을 본업으로 삼았다. 이 단어는 종종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다단계를 번지르르한 단어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고, 영업의 첫 대상이 지인인 경우가 많아, 사람들을 귀찮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70~80년 대 방문 판매 등을 통한 다단계 영업 피해 사례들이 전 국민적으로 학습이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빠 왈, 10년 동안 검증해 온 가장 멋진 시스템이라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소득도 안정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엄마는 늘 그런 아빠에게 아직까지도 아쉬운 소리를 참지 못한다. 아빠가 퇴사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받았을 혜택이 눈에 아른거리는 것 같다. 그 시점의 엄마와 아빠는 이 주제로 자주 다투기도 했다.
수익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번듯한 직장'이라는 프레임이 사라지자 나 또한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종종 아버지의 직업을 말해야 할 순간이 오면 네트워크 마케팅이라는 단어가 왠지 창피하게 느껴졌고 부연 설명을 덧대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바로 직전 직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첫 입사 후 관리부 상무님과 면담을 가졌다. 면접 당시 거리가 꽤 있는 곳에서 이사하는 나를 위해 회사에서 월세 지원을 논의해 보겠다고 하여, 구체적인 내용을 합의하는 자리였다.
상상조차 어려운 구시대적 질문이 던져졌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버지는 뭐하시니?"라는 질문을 들었다.
나는 딱히 설명해야 할 단어를 찾지 못해 "개인 사업하세요."라고 했다.
그런데 또 굳이 무슨 개인 사업인지를 궁금해하셨다.
"네트워크 마케팅하셔요."
상무님은 "아~ " 했다.
다 알겠다는 듯한 그 상무님의 눈빛, 그리고 결국 그 방정맞은 입을 참지 못하고 내뱉은 말은
"그거 다단계잖아, 그럼 너희 집도 여유가 딱히 없겠네."
입사 전부터 협의되어 있던 월세 지원은 우리 집이 여유 없는 상황이라는 이유로 왠지 정당화되는 듯했다.
아빠는 나에게도 종종 아빠가 하는 일에 대해 설명하려고 했다.
당시 스무 살 초반의 나는 틈만 나면 사업 설명회를 듣게 하려는 아빠가 싫었다.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 건 맞았지만 나는 굳이 "그렇게" 돈을 벌고 싶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좋은 회사>에 입사하는 게 꿈이었는데, 자꾸 나한테 양복 입은 사람들 틈 사이에서 강의를 듣도록 권유하고, 1박 2일의 워크숍을 참여하라고 하기에 그저 거부감부터 들었다. 어느 날은 "아빠는 나만 보면 그 얘기야!"라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나는 아빠가 나를 가만히 놔뒀으면 했다. 그냥 내 꿈을 좇도록.
아빠는 어쩌면 세상에 돈을 버는 방법은 다양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지금 20대의 끝자락에 서 있고, 퇴사를 세 번이나 겪었다. 지금은 아빠가 퇴사를 결심한 이유도, 아빠의 궁극적인 목표도 이해가 되는 나이가 되었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 끝에, 피곤한 몸을 뉘이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아빠는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면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을 읽었다. 이름이 독특해서 기억이 나는데, 지금까지도 그 책은 베스트셀러다. 책은 예나 지금이나 '돈'에 지배당하지 않는 삶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비슷한 메시지의 책과 강연이 많이 출시되며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목표가 되었다.
고용 불안정으로 퇴직 후의 삶을 두려워하며 살기보다는, 불로소득과 경제적 자유를 얻고 세상을 떠난 후에도 남은 이들에게 소득의 굴레를 전달해 줄 수 있는 삶.
막 50대가 지난 신 부장은 다달이 들어오는 월급보다 더 큰 것을 추구했고, 당신뿐만 아니라 가족에게 더 나은 삶을 주고 싶어 막다른 길을 선택했다.
나는 아직도 아빠가 하는 사업의 시스템을 정확하게 모른다. 내 코가 석자라 정신없이 20대를 보냈다. 애써 무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빠의 생각을 대하는 태도에는 분명한 변화가 있다.
예전에는 니즈가 있는 사람들을 직접 발로 뛰며 찾아야 했다면, 지금은 사람들이 직접 니즈를 충족시켜 줄 사람을 찾는 시대다. 나는 아직 규모가 작지만 500명 정도 매일 방문하는 블로그에 회원을 모집하는 글을 올리게 되었고, 아빠는 내 이름 앞으로 개통이 발생하면 수익을 달아 주겠다고 했다.
나의 개인적인 공간에 아빠가 하는 일을 노출시킨다는 것은 정말 큰 변화를 말해주고 있었다. 청소년기부터 쭉 부끄러워하고 피해왔던 일이었으니까.
예전의 내가 아빠 사업에 관여하기 싫었던 것은, 업종에 대한 편견이 큰 탓도 있었다. 거부감부터 가지고 들었고 싫다고 밀어내기 바빴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도 사실 아빠의 반복된 제안이 있었지만, 저품질 운운하며 뒤로 빼기 바빴다. 이렇게 아빠는 아직도 끊임없이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과 싸운다. 그중에 가장 힘든 상대는 가족이었을 거다.
퇴사 후 사업자를 내고 이런저런 비즈니스를 기획해 보며, 돈을 만들어 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했다. 고객을 모집하고 소비자의 지갑을 여는 이들은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는 것을,
불법이 아니라면 어떤 아이템이든 수익을 창출해 낸다면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배운 것 같다.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아빠를 도와주고 싶었다. 아빠가 느꼈을 실망감을 지금에라도 채워 주기 위해서 말이다.
문득 이런 생각도 한다. 지금의 아빠는 참 행복해 보인다. 농업 관광 학교라는 것도 다니고, 주말 농장에서 깻잎과 감자를 캐 오기도 한다. 지금보다 더 미래에, 노년에 꿈꾸는 당신의 모습도 분명히 있다. 아빠가 회사를 계속 다녔다면 지금과 같은 시간적 여유를 누릴 수 없었을 테고, 더운 날에 양복이 젖어가며 출퇴근을 하고 계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꿈이 있었을지.....
"나는 아빠 맘 다 이해해."
엄마가 또 10여 년 전 아빠의 퇴사 이야기를 꺼내며 아쉬운 소리를 하면, 나는 아빠를 대변한다. 그럼 엄마는 둘이 어쩜 그리 똑같냐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는다. 회사 싫다고 때려치우고 나오는 것도, 그놈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도, 질려 죽겠다는 눈치다. 나는 그러면 그저 "엄마는 몰라."하고 웃는다.
이건 진짜,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마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