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래 희망'이라는 단어를 최근에 못 들은 지 오래다.
학창 시절만 해도 어른들의 질문은 "장래 희망이 뭐니?" 였는데, 이제 어른이 된 나에게는 아무도 장래 희망이 뭐냐고 묻질 않는다. 왜 그럴까?
장래 희망
(將來希望) 장차 하고자 하는 일이나 직업에 대한 희망
어린아이였을 때, 장래 희망이 뭐냐는 질문에 우리 반 아이들은 '의사'나 '변호사'나 '외교관'이나 '가수' 등 특정한 직업을 대답해야 했다. 사실 나는 의사가 딱히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한 반에 10명 이상은 의사가 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어쨌든 의사라고 대답했다.
의사, 변호사, 가수 등 몇 가지 선택지 앞에서 내가 고르고 싶은 것은 딱히 없었는데, 그래서 친구들이 가장 많이 적어냈던 의사를 나도 골랐다.
졸업사진 밑에도 장래 희망을 기입하라고 한다. 으레 그래 왔듯, 의사를 적어 냈다. 만약 졸업 앨범에 기록된 대로 아이들이 꿈을 꾸었다면 우리나라 의사 지망생이 30%는 넘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십 수년 후 이들은 내가 그려왔던 '나'와, 변한 사회에서의 괴리감을 느끼고 있다.
물론 지금은 예전과는 달리 '유튜버' 'BJ'같은 직업이 새로이 추가되었다고는 하는데 어쨌든 직업명으로 내가 되고 싶은 것을 구분하기를 시작하는 게 나는 후에 이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교과서에 나오는 의사는 대체로 흰 가운을 입고 청진기를 메고 있으며, 변호사와 외교관은 양복을, 가수는 화려한 옷을 입고 마이크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직업에 대해 형성된 기대치와 형상화가 강해질수록, 괴리감도 쉽게 느낀다.
나는 장래 희망이 변화무쌍한 경우이긴 했지만, 어쨌든 의사였다가 가수였다가 MC였다가 그랬다. 당연히 내가 스무 살이 넘은 시점에는 이들 중 한 가지 직업을 목표해 달려가는 중일 것이라고 예상했고, 스물다섯 혹은 여섯이 되면 버젓이 일을 시작해서 20년, 30년 같은 일을 전문성 있게 해 내는 내가 있을 거라고 상상했던 것 같다.
성인이 되자 초등학생 시절 꿈꿨던 '의사'와 나는 거리가 먼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어떤 아이는 장래 희망을 '회사원'이라고 적어 냈듯이 회사원도 하나의 직업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회사원이 되고자 했다. 회사원이 되기로 결심한 다음에 어떤 회사를 들어가면 좋을지, 어떤 일을 할지를 생각했다.
옛날 교과서에 나오던 회사원은 양복을 입고 서류 가방을 든 남자 어른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회사원이 되면 다 정장을 입고 회사를 다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회사원이 있고, 아닌 회사원이 있었다. 그동안 너무 많은 것들이 변해서 직업이 세분화되고 '마케터' '기획자' '디자이너' '개발자'와 같은 새로운 전문업도 많이 생겼다. 나는 막연하기만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회사원이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몰랐다는 게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이었다.
지금도 아마 '회사원', 혹은 더 좁혀서 '기획자' 혹은 '마케터'가 무슨 일을 하냐고 묻는다면 그 직업을 가진 사람조차도 정의가 어려울 것이다. 이런 어려움이 계속되니 사람들이 점점 특정한 직업으로 명명되기를 거부하고 '~를 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하기도 한다. 이렇게 소개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먼저 생각한 뒤에 그에 필요한 일을 한다는 것이다.
직업이라는 틀에 일을 가두지 않게 되면, 일의 범위가 늘어난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지를 먼저 생각하면 하나의 흐름 안에서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영업 사원이 되기도,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 되기도, 교육을 하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흐름을 타는 사람 중에 한 명이다. 그런데 이를 알아채기까지, 그리고 내 생각과 현실의 모순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방황과 혼란이 있었다. 어쨌든 바깥에서 나를 소개해야 할 때면, 사업을 한다,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한다,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작은 범위로 내가 꿈꾸는 일들을 정의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래서 나는 장래 희망을 묻는 것이 아이들에게 하는 가장 잘못된 질문 중 하나인 것 같다. 직업 교과서나 직업 리스트를 들여다보며 경찰이나 간호사가 나와 잘 맞는 직업일지를 미리 판단해 보는 일종의 일들도 너무 섣부른 것 같다.
아이들의 답변이
"의사가 될래요."
"가수가 될래요."
"과학자가 될래요."가 아니라
"저는 사람들의 아픔을 돌봐 주고 싶어요."
"저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지구가 아프지 않게 도와주고 싶어요."
위와 같은 대답이 나올 수 있는 질문이어야만 우리가 겪어 온 '일'에 대한 딜레마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