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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일진 Sep 10. 2024

10화: 너를 잃지 않는 순간

낯선 이의 속삭임

서현은 언니와의 만남 이후로 한동안 망설였다. 그녀는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았던 어둠과 마주하면서도, 그 안에서 새로운 빛을 찾으려 애썼다. 그날 이후, 그녀는 자신을 더 이상 고립시키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며칠이 지나고, 서현은 익숙한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날씨는 화창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흐릿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과정은 생각보다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다. 카페 창밖으로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서현은 무심코 그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어딘가 낯익은 기분이 들었다. 그 남자는 서현이 앉아 있는 창가 근처의 자리로 다가왔다. 그는 잠시 서현의 옆을 지나가다가 자연스럽게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저기... 이 자리 괜찮을까요?"


남자가 부드럽게 물었다.

서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앉으세요."


남자는 자리에 앉아 조용히 책을 꺼내 들었다. 그 순간, 서현은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의 존재가 마치 공기 속에 섞인 새로운 에너지처럼 느껴졌고, 그것은 그녀를 미세하게 흔들었다. 그 남자는 말없이 책을 읽고 있었지만, 서현은 그와 함께 있는 공간이 갑자기 좁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하며, 커피잔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남자는 책에서 눈을 떼고 서현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여기 자주 오세요?"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서현은 놀란 듯 그의 말을 들었다가 곧 답했다.


 "네, 자주 와요. 여기가 좀 조용해서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그렇죠. 생각 정리하기에 이만한 곳이 없더라고요."


그의 말은 평범했지만, 그 미소에는 뭔가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듯했다. 서현은 순간 그와의 대화가 너무 자연스러워, 마치 오랜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그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었지만,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현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묻고 싶었던 질문을 꺼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녀 자신도 그 질문이 왜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남자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누구인지를 잃지 않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의 대답은 단순했지만, 서현에게는 마치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답을 듣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서현은 남자와의 대화를 계속 이어갔다.


"그럼,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고 있나요?"


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미소 지었다.


"매일 조금씩 더 알아가는 중이죠. 확실한 건, 그 과정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 같아요."


서현은 그 말에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말은 언니의 조언과도 맞닿아 있었다. 그녀는 다시 눈을 떴을 때, 자신의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묵혀 있던 감정들이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남자에게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요. 당신의 말이,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남자는 그 말을 듣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때로는 낯선 사람과의 대화가 우리가 필요한 답을 찾게 해 줄 때가 있죠."


그날 카페에서의 짧은 대화는 서현의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녀는 그 남자와의 만남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느꼈다.

서현은 남자와의 대화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아까 있었던 대화를 곱씹었다. ‘내가 누구인지를 잃지 않는 것.’ 그의 말은 서현의 마음을 강하게 울렸다. 그것은 단순한 철학적 명제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잃고 방황했던 그녀에게는 삶을 새롭게 정의하는 단서가 될 수 있었다.

서현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남자의 뒷모습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와 나눈 짧은 대화는 그녀의 내면에 미묘한 균열을 만들어냈고, 그 균열은 점차 그녀의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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