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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일진 Sep 10. 2024

11화: 경계 너머의 진실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요?"

사라진 경계에서

서현은 다시 그 카페를 찾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날 것 같은 묘한 예감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같은 자리, 같은 커피. 카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은 여느 때처럼 들어왔다 나갔다. 그러나 그날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서현은 창가에 앉아 책을 펼쳤지만, 머릿속은 온통 그 남자의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 남자는 누구였을까?’


그 질문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녀에게 말을 걸었고, 서현이 오랫동안 혼자 씨름하던 질문에 답을 던져준 것만 같았다.


‘내가 누구인지 잃지 않는 것...’


그 말이 자꾸만 귓가에 울렸다. 그의 미소와 눈빛, 그리고 짧은 대화 속에 담긴 무언가가 서현의 마음을 건드렸다.

카페를 나서던 서현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목소리, 그의 말투, 그의 표정—모든 것이 어딘가 익숙했다. 하지만 분명 처음 만난 사람인데, 왜 그가 이렇게까지 친근하게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그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서현은 머릿속을 더듬어 보았지만, 기억이 흐릿했다. 꿈에서 만났던 사람의 얼굴을 기억해 내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남자의 존재는 분명 실재했다. 그의 목소리와 존재감은 너무나 생생했기에, 꿈이라고 치부할 수 없었다. 서현은 카페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때 카페 문이 열리며 그 남자가 들어왔다.


“서현 씨, 다시 만났네요.”


그의 목소리는 이번에도 부드러웠고, 그의 미소는 따뜻했다. 하지만 서현은 그에게 무언가 미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서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서현 씨가 찾고 있는 답은 이미 서현 씨 안에 있다는 거예요.”


서현은 그를 바라보며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대로, 그녀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답은 그녀가 오랫동안 피하려 했던 진실이었을지도.


“지금 이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그녀 자신도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는 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 앞에서는 더 이상 감정이나 질문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남자는 책을 덮고 서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깊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 아마도,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걸 느끼는 것 아닐까요?"


그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요. 꿈, 사람, 감정. 그런데 결국 남는 것은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 같아요."


서현은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가 한 말은 너무 단순해 보였지만, 그 안에는 깊은 진실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다시 그에게 물었다.


"그럼,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요?"


남자는 살짝 웃었다.


 "그건 어려운 질문이에요. 난 나 자신을 계속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한 가지는 확실해요. 내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


그의 마지막 말에 서현은 잠시 멈칫했다.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동시에 그 말이 어딘가 그녀에게도 적용된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어쩐지 그가 자신과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서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당신도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아나요? 나도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기분이 들어요."


남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신도 그걸 느끼는군요."


그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다.


 "사실, 우리 둘 다 이 세상을 떠나고 있거든요."


서현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떴다.


 “떠나고 있다니요?”


남자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당신도 아직 모르는 것 같지만, 우리 둘 다 이 세상에서 물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아요. 나는 이미 죽었어요. 그리고 당신도, 사실은...”


그 순간 서현의 심장이 멎을 듯했다.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미묘한 감정, 이 남자에게 느껴지는 익숙함, 그리고 자신이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는 기분. 그녀는 차가운 현실을 마주했다.


"내가... 죽어가고 있다고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 당신의 몸은 병원에 누워 있어요. 그리고 여기에 있는 당신은... 영혼이에요. 나처럼."


서현은 충격에 빠졌다.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을 찾았다고 느끼는 순간 이후에도 점점 더 기운이 없어지며 당혹스럽게 느껴지던 순간들,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이 단순한 우울이나 혼란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이 남자는 그 진실을 말해 주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그럼 이제... 난 어떻게 되는 거죠?"


서현은 고개를 떨구며 물었다.


남자는 서현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지금부터는 당신이 선택해야 해요. 이곳에서 계속 머물지, 아니면 더 나아갈지. 중요한 건, 이 순간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거예요. 삶은 끝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우리가 누구로 남느냐는 거죠."


서현은 그 말을 곱씹었다. 자신의 삶이 끝나가는 줄 알았지만, 그 속에서 다시금 스스로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이 떠올랐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중요한 것은 당신이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거죠. 선택은 당신의 몫이에요.”


그는 마지막으로 서현을 바라보고는 조용히 카페를 나섰다. 서현은 혼자 남겨졌지만,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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