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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일진 Sep 10. 2024

3화: 고요한 무게

침묵 속의 외침

고요한 무게

서현은 또다시 기계처럼 아침을 맞이했다. 창밖에서 비추는 햇살은 눈부셨지만, 그것은 그저 그녀에게 하루를 시작하라 독촉하는 채근같았다. 알람 소리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차가운 욕실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세면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서현은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이 얼굴이 나였나…'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인식하지 못했다. 거울 속의 여자는 지쳐 보였고, 무기력했다. 희미한 눈빛과 누렇게 뜬 얼굴은 부석하다못해 추하게 느껴졌다. 어제도, 그저 하루를 버텨낸 것뿐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현은 아침 준비를 마친 뒤 회사로 향했다. 사람들은 늘 그렇듯 바삐 움직이고, 지하철은 만원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투명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출근길에 서 있는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 분명했지만, 서현에게는 목적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지하철의 잡음이 그녀의 귀에 멀게 들렸고,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모든 것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자신은 그 흐름에서 벗어난 채 고립된 기분이었다.


회사에 도착해 책상에 앉았지만, 여전히 감정은 없었다. 컴퓨터를 켜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지만, 그것은 그저 하루를 흘려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일이라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 의미가 없었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무미건조한 업무,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자신 역시 무감각했다. 주변의 동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웃으며 대화했지만, 서현은 그저 그들의 대화를 듣는 시늉만 할 뿐, 그들에게 끼어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서현 씨, 어제 그 보고서는 잘 마무리됐나요?"


옆자리의 동료가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어색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동료의 물음은 그저 형식적인 대화였다. 서현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대답도 그저 형식적이었다.


 "네, 마무리됐어요."


대화는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동료는 대답을 듣자마자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마치 그 짧은 대화조차 서로에게는 의미가 없는 듯, 모든 것이 건조하게 흘러갔다.


점심시간이 되자, 서현은 동료들과 함께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메뉴판에 적힌 음식들조차 그녀에겐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서현은 무심하게 쟁반 위에 음식을 담고, 동료들과 한 테이블에 앉았다.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는 끊임없었다. 주말에 본 영화, 새로운 프로젝트, 그리고 집안 이야기. 그러나 서현은 그 모든 대화를 그저 들을 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현이 침묵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녀는 늘 그랬으니까.


“서현 씨, 주말에 뭐 했어요?”


동료가 불쑥 묻자,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주말? 서현은 주말에 무얼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무감각하게 시간을 흘려보냈을 뿐이었다.


"그냥… 집에서 쉬었어요."


서현은 힘겹게 대답했다. 동료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 다시 몰두했다. 그 역시 그녀의 대답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 듯했다. 서현의 존재는 그저 그들 사이에서 희미하게 스쳐 지나가는 공기처럼 느껴졌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다시 회사로 돌아왔지만, 업무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흘러갔다. 서현은 화면에 떠 있는 숫자와 데이터를 바라보며 문서 작업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 마음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저 눈앞의 일이 끝나길 기다리며, 하루를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려 애썼다.


하루가 마무리될 즈음, 서현은 책상 위에 놓인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업무 외에 새로운 메시지나 알림은 없었다. 회사에서의 하루도 끝나가고 있었지만, 서현의 마음속엔 여전히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저 또 하나의 무의미한 날이 지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서현은 천천히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동료들은 각자 서둘러 일어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퇴근길로 나섰다. 그들 역시 무의미한 하루를 끝내고 싶어하는 듯했다. 서현도 그들처럼 회사를 나섰지만, 마음속엔 여전히 공허함만이 남아 있었다.


하루는 이렇게 끝났지만, 또 다른 무의미한 하루가 서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일도 오늘처럼 아무런 감정 없이, 기계처럼 반복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서현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지고 있었다. 감정이 없는 하루는 오히려 그녀에게 익숙한 친구처럼 다가왔고, 그녀는 그 무감각함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그 질문은 수없이 떠올랐지만, 답은 없었다.


“서현아.... 서현아.. 여기야.”


그때 어디에선가 어린 소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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