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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일진 Sep 10. 2024

2화: 사라지는 시간, 남겨진 기억

그날의 우린 없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얼굴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숨이 멎은 것처럼 시간이 느려지고, 주위의 소음이 멀리 사라지는 듯했다. 그와의 기억이 아주 잠깐이지만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하지만 그는 서현을 보지 못했다. 그냥 지나쳤을 뿐이었다. 사람들 틈에 묻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멍하니 그가 사라지는 방향을 바라보며 스쳐 지나간 감정과 함께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던 자신도 그 길에서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준호가 떠난 후 다시금 돌아온 차가운 현실은 그녀를 무겁게 짓눌렀다.   

  

'넌 지금도 그렇게 빛이 나는데, 난 여전히 어둡고 초라하구나...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어...'

   

서현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마치 그가 알아봤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려는 듯, 애써 아무 일도 없었던 척했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솟구친 감정들은 한순간의 착각이라고, 이미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편에선 깊은 아쉬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텅 빈 마음을 품고 집으로 돌아왔다. 낡은 열쇠를 돌려 문을 열었을 때, 마주한 집은 그녀의 감정을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집 안에는 그 어떤 따뜻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서현의 공간은 마치 남의 집처럼 느껴졌다. 삶의 흔적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 흔적들조차 무질서했다. 거실 한구석에는 옷가지들이 무심하게 쌓여 있었고, 현관에는 어지럽게 널려 있는 신발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다.     


‘모든 게 엉망이야.’     


서현은 방 한가운데에 서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공간인데도 익숙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무질서했다. 책상 위에 놓인 고지서들은 제때 납부되지 못한 채 쌓여갔고, 탁자 위에는 아직 뜯지 않은 우편물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서현의 삶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무거운 한숨을 내쉰 그녀는 냉장고 문을 열어 물을 찾았지만 냉장고는 거의 비어 있었다. 며칠, 아니 몇 주 동안이나 식사다운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텅 빈 냉장고 안을 바라보며 서현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는 일곱 살의 나이 차이가 있는 다정한 언니를 참 잘 따르는 아이였다. 가난한 가정형편으로 일찍 철이 든 언니는 텅 빈 냉장고를 보며 반찬투정하는 서현을 받아주며 밥 숟가락에 김을 얹어 밥을 먹이던 엄마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아빠는 서현이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시다가 척추를 크게 다치셨고, 서현이 3살이 되던 해부터는 혼자서 움직이지 못할 만큼 힘들어지셨다. 하지만, 누구보다 서현과 언니를 사랑해 주셨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유일한 삶의 낙이라고 하셨다. 서현보다 일곱 살이 많은 언니는 참 어른스러운 말도 많이 했다. 하루는 지연이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아빠는 오래오래 우리랑 함께 살 거야. 그렇지?”


“그래. 그러자. 그런데 만약에 말이야. 아주 아주 만약에 그럴 수 없게 되더라도 우리 지연이는 아빠 안 미워할 거지?”


“약속은 지켜야지 아빠! 그냥 아빠가 오래오래 우리 옆에 있어주기만 하면 돼. 그리고 할머니가 그러셨는데, 사랑하는 사람은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데. 그리고 사랑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은 영원히 살 수 있는 거래. 눈에 보이지 않게 되더라도.... 그래서 나는 아직도 할머니를 꿈에서 만나잖아~ 아빠도 그러면 돼지. 서현이랑 내가 많이 많이 사랑해 줄 거니까.”


서현이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아빠는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

서현은 아직 죽음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는 나이였다.

아빠의 병간호를 하며 서현과 지연을 키워나가며 억척스러워 저 씩씩한 척하던 엄마도 한동안 울며 지냈지만, 서현과 지연을 키우기 위해서는 충분한 애도의 시간도 없이 일터로 나가야 했다. 아빠가 안 계신 집에서 어린 서현을 돌보는 건 오롯이 지연의 몫이었다.


그날 아침은 유난히 날씨가 좋았다.


“서현아. 오늘 비 온댔어. 우산 가져가.”


“싫어 언니 무거워. 그리고 나 맨날 잊어버린단 말이야. 하늘도 이렇게 파란데 비는 무슨. 비 오면 언니가 나 데리러 와.”


“언니 오늘 학교 늦게 끝나는 날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가져가.”


점심이 지나자 창밖으로 두두둑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한바탕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천둥까지 번쩍거리고 있으니, 지연은 도무지 수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연의 말을 듣지 않고 학교로 간 서현이 걱정되어 조퇴를 하고 서현을 데리러 갔다. 오늘 지연이 늦게 온다는 말을 들을 서현은 그냥 비를 맞기로 했다.


온몸이 흠뻑 젖은 채 횡단보도 앞에 섰다. 그런데 맞은편에 지연이 보였다.


“어! 언니다. 언니~~.”


“응 서현아~ 거기 있어. 기다려.”


서현은 언니를 보자마자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빨간불인 줄 모르고 지연만 보고 달리는 서현이 걱정되어 지연도 급하게 횡단보도로 뛰어들었다.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로 도로는 이미 흥건히 물줄기를 만들었고, 차들은 속도를 줄이고 있었지만, 서현과 지연이를 늦게 발견한 트럭은 무게에 못 이겨 브레이크가 잘 작동하지 않았다.


“끼이이이익. 빵 빵!!!!!!”


타이어 타는 냄새와 함께 시끄러운 경적이 울렸다. 잠시뒤 정신을 차린 서현은 눈앞에 누워있는 지연을 발견한다. 난 생 처음 보는 붉은 물결들이 지연의 온몸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빠를 많이 사랑했던 서현의 언니 지연은 그날 그렇게 아빠에게로 갔다.

그때였다. 서현이 혼잣말을 시작하고 아무도 듣지 못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때가....     


서현은 냉장고 문을 조용히 닫고, 거실 한가운데로 돌아왔다.      


“언니 오늘 언니도 봤지? 준호 씨.... 여전하더라. 그렇지?”


침대에 누운 서현은 천장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없는 삶은 이렇게 차갑고 공허할 줄 몰랐다. 한때는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던 그 순간들이 이토록 허무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준호와 함께 있던 그 시절, 서현은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남은 것이라고는 그때의 잔재뿐이었다.     


'그때의 우린 이제 없어.... 그리고 그때의 나도 없어...‘     


서현은 자신에게 속삭였다. 더 이상 그때의 순간들이 돌아올 리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녀는 마음속에서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말자고 결심했지만, 그 결심조차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게 누워 있는 동안, 방 안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서현은 눈을 감았다. 오늘 본 준호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지만, 애써 지우려 했다. 그를 떠올리는 것은 또다시 상처를 끌어안는 일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 걸까... 그때도... 지금도.....’


서현만 그 답을 모르는 것 같았다. 준호와의 시간은 이미 끝났고,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한 페이지였다. 서현은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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