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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일진 Sep 10. 2024

1화: 그 날

멈춘 시간 속에서

"멈춘 시간 속에서"

퇴근길의 서울은 언제나 활기로 가득했다. 빌딩 숲 사이로 붉게 물든 저녁 햇살이 스며들었고, 거리는 지친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붐볐다. 그러나 서현은 그 모든 소란을 마치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는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거대한 도시는 그녀를 향해 숨 쉬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숨결을 느낄 수 없었다. 그녀의 목에서 달랑거리는 사원증만 팔랑거릴뿐 어딘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기분, 혹은 세상과 자신의 사이에 투명한 벽이 놓인 것만 같았다.     


‘정서현.......’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이름... 서현은 자신의 이름이 낯설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그렇게 부르지만, 그 이름은 그녀에게 속하지 않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숨이 막히지?”    

 

서현은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주변 사람들처럼 빠르게 걸어갈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분명 어떤 목적지가 있는 듯했지만, 서현에게는 그조차 없었다.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자, 사람들은 물밀듯이 쏟아져 나와 길을 건넜다.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이 마치 군무를 추듯 완벽한 타이밍에 맞춰 그녀의 앞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서현을 지나, 그녀와는 상관없는 다른 세상으로 흘러가버렸다.     

서현은 신호를 놓친 채, 횡단보도에 선 채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장면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녀만 시간이 멈춘 듯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계속 움직였다. 그 차이가 그녀를 더 깊은 고립감으로 몰아넣었다.     

"이대로 멈출 수 있다면 좋겠어. "     


그녀의 머릿속에 스쳤던 생각은 예상치 못하게 생생했다. 그저 지나가는 생각으로 여기기엔, 너무도 실제 같았다. 만약 지금, 그냥 사라질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망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그녀의 부재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니, 아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횡단보도 건너편, 불빛이 번쩍였다. 마치 세상이 그녀에게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 빛은 순식간에 그녀의 앞을 지나갔고, 서현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발밑의 도로에서 차들이 쉼 없이 지나다녔다. 저들처럼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서현에게는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조차 희미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그녀는 이런 무감각한 삶을 살게 된 것일까? 이십 대의 서현은 분명 더 생기 넘치고 꿈을 꾸던 사람이었다. 그때는 세상이 넓고 흥미로웠고,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다. 그가 서현의 곁에 있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제 서른이 넘어가면서, 그녀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았다. 꿈은 너무 멀었고, 현실은 너무 무거웠다.     


그녀는 눈을 감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차들의 소음,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리고 지하철이 다가오는 진동까지도 이제는 그녀의 심장을 두드리지 않았다. 심장이 뛴다고는 하지만, 그저 기계처럼 반복될 뿐이었다. 매일 같은 일상, 같은 길, 같은 공허함. 끝없는 회전목마에 갇힌 것처럼 그녀는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제 그만 멈춰....”     


서현은 혼잣말을 했지만, 누구도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아니, 누구가 들었다고 해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어차피 세상이 주는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더 이상 그녀의 삶에는 ‘다음’이라는 것이 없었다. 어제도, 내일도 없이, 오직 오늘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오늘마저 무의미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무언가가 서현의 시선을 끌었다. 건너편에서 한 남자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이상하게도 그 남자의 모습이 유독 선명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아니, 낯익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했다. 준호였다. 그녀의 과거, 그녀의 첫사랑.     


순간, 그녀의 숨이 멈춘 듯했다. 마치 시간이 다시 느려진 것 같았다. 그가 이 도심 속에서, 이 순간에 왜 나타난 걸까? 서현은 놀란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변함없었다. 여전히 차분하고, 따뜻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눈빛이 그녀를 그때로 데려갔다.   

   

서현은 준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녀가 학교로 오는 시간에 딱 맞춰 탄 버스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서현은 밀리고 밀려 뒷문아래까지 내려와 꽉 끼어있었다. 이미 가득 찬 공간에 발 디딜틈조차 없었는데 사람들은 자꾸만 서로를 밀고 밀어서 서현을 뒷문에 등을 지고 납작하게 붙어있게 만들었다. 차가 정차하기도 전에 뒷문이 열리면서 몸을 돌릴 시간도 없이 그대로 뒤로 넘어가며 서현은 본인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어어어... 아~~ 악.”


달리던 차의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찧으려는 찰나에 은색의 반짝이는 팔찌를 한 누군가의 손이 서현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몸을 굽혀 다른 한 손으로 허리를 꽉 안았다.    

  

“큰일 날 뻔했어요. 괜찮아요?”


놀랐던 건 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서현은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서현과 준호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준호는 대학시절 만나 7년 동안 사랑한 유일한 사랑이었다. 서현의 불안함을 이해하고 늘 괜찮다고 안심시키던 유일한 남자. 대학시절 유일하게 진심을 털어놓고 싶게 만들었던 준호와는 캠퍼스 커플이었다. 준호는 태양그룹이라는 대기업에 지원을 받아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졸업 후에도 취업걱정이 없어서 그런지 또래 다른 동기들과는 다르게 허세가 없고 여유가 있는 사람 같았고 서현은 그에게만큼은 거짓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준호는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준호가 먼저 졸업을 하면서 한국지사에서 근무하기 전 2년 동안 애리조나에 있는 해외지사에 인턴쉽을 가게 되었고, 그는 서현을 배려하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올 테니까 좋은 사람 만나서 데이트도 하고 그래.”


“무슨 말이야 그게... ”


“너 혼자 있는 거 힘들잖아. 그래서 하는 말이야. 나 돌아올 때까지 데이트도 하고 그러라고.”


훈련으로 너무 바빠 연락하는 날이 드물었지만, 서현은 가끔 오는 편지 만으로도 그가 잘 지내는 것 같아 좋았다. 그걸로 충분했으니까.


2년이 지나 서현도 졸업을 했다.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던 서현에게 준호가 말했다.


“난 시간이 지나면서 성장하는 사람이 매력이 있는 것 같아. 늘 불안해하고 걱정만 하는 너는 내가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어. 매번 시작하는 것도 두려워하니까 말이야.”


그랬다. 탄탄한 미래를 만들어 나가며 자신과 같은 그룹에 속한 사람들과 만나고 있던 준호의 눈에 서현은 한없이 초라한 존재였다. 준호의 말에 아무 말도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던 서현에게 준호가 말했다.


“우리 시간을 좀 갖자.... 나한테 시간을 좀 줘.”


준호의 세상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무리에 서현은 없었다.


준호는 3년 뒤 서현에게 돌아오리라 약속하는 서약서를 쓰고, 본인이 그동안 그녀로 인해 경험해보지 못한 많은 것들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종이 조각뿐인 서약서였지만, 서현은 그 이후에도 그를 믿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들이 이별한 게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서현은 그가 말한 3년 동안 내 생활에 충실했고, 시간이 지나 그들이 만나기로 한 날이 되었다.

3년이 지난 서현의 생일날 그는 약속을 지켜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기다리던 얼굴에 너무 기뻐 그의 손을 잡으려 손을 뻗자, 준호는 몸을 비켜 손을 피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어색한 거라 생각한 서현을 그녀가 좋아하던 레스토랑에 데려간 준호가 꺼낸 말은 최악이었다.


“나 곧 결혼해. 너랑은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더라. 우리 가족들도 너는 좀 어려울 것 같단 이야기를 널 만나는 내내 했었어. 너도 언젠가 나이가 든다면 지금의 너희 어머님처럼 나이 들어가겠지? 너랑 계속 이어가다 보면 너희 가족들까지 내가 책임져야 할 것만 같아서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해. 미안하다.”


서현은 도망치듯 밖으로 나와 한참을 걸었다. 그날이 그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온몸이 쪼그라드는 듯했다.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지던 그날의 서현은 여전히 준호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곧 현실로 돌아왔다. 준호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리고 서현의 마음속에서는 미묘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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