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그 완벽한 독일 남자가 사는 집, 집들이에 초대받았다. 초대받은 순간부터 뭘 사들고 가야 하나 고민했다. 뭘 좋아할까... 맛있는 맥주에 소시지를 사 가야 할까, 아니 그들이 이미 맥주 소시지 전문가일 텐데. 에라 모르겠다. 입 맛에 맞건 아니건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의 딸이므로 꿋꿋하게 '해물 파전에 한국 와인'을 들고 갔다. 마음 같아서는 막걸리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구하기 쉽지 않았으므로. 다행히 한국에서 물 건너온 귀한 '이육사 와인'이 있었다. 유럽에서 오신 분들 입 맛에 맞는 좋은 와인을 사 가려면 끝도 없을 것 같고,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컨셉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컨셉이라니, 매일 보던 부동산 중개인 집에 가면서 나는 왜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나도 모르게 마스카라를 꺼내서 속눈썹을 올리며 '환불 메이크업'을 완성하고 있었다.
이 독일인 부동산 중개업자 이야기만 나오면 나도 모르게 생각이 많아졌다. 인간적으로 부러운 모든 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성품이 너무 훌륭해서 인격적으로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근데 나이까지 어렸다. 나보다 동생이지만 인생의 멘토로 삼고 싶었다. 존경스러웠고 한 편 부러웠다. 동시에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따라잡지 못할 것 같은 질투가 섞인 못난 내 모습을 들여다봐야 했기에 혼란스러웠다. 누군가를 바라보며 이런 양가감정을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우리가 부러워할 만한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사실 주변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아니 또 인격적으로 존경할만한 사람들도 꽤 있다. 하지만 행복한 가정생활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있으면서, 경제적으로 월등히 성공했으며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나보다 어리기까지 한 경우는 사실 처음이다. 우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직접 보고 있었지만 뭔가 비현실적이었다. 물론 아주 깊이 들여다보면 그의 인생에도 다 희로애락이 있겠지만.
'네가 사는 그 집~'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마당을 갖고 있었다.마당이라기엔작은 공원을 개인 소유로 가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동네 입구를 통과해서도 한참 들어가야 건물이 보였다. 잘 가꿔진 공원 한가운데 집이 있는 느낌. 그 넓디넓은 정원 한가운데에는 사슴 가족이 뛰어놀고 있었다. 한국에서 평생 자란 나에게 사슴은 동물원에 가야 볼 수 있는 동물인 것을... 야생 사슴이 뛰노는 마당이라니 직접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 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당의 저 푸른 초원 위는AI를 탑재했다는 '로봇 잔디 깎기 기계'가 조용히 돌고 있었다. 마당 한 편은 직접 텃밭을 가꾸어서 블루베리, 라즈베리, 고추, 파프리카, 토마토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그리고 애완 닭 네 마리가 뛰어다니며 매일 달걀을 제공해준다고 했다. '앗 혹시 저 녀석들이 황금알을 낳나?'나의 유치한 상상은 끝이 없군. 또 마당 한 편에는 페루에서 왔다는 '기니피그'를 키우고 있었다. 긴 머리칼 휘날리는 그 기니피그의 이름이 헤르미온느라니. 둘째 딸의 작명 센스가 마음에 들었다. 가운데 넓고도 고요한 수영장이 인공적인 푸른 물 빛을 품고 9월 오후의 반짝이는 햇살을 샹들리에처럼 비춰내고 있었다. 높은 지붕부터 내려오는 삼각형의 통유리 전면 벽이 집이라기보다는 교회나 성전처럼 보이게 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나도 모르게 마음이 경건해지며 찬송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 집엔 아무래도 '위대한 개츠비' 영화 OST가 흘러나와야 어울릴 것 같았지만. 어쩌겠는가 대한민국에서 평범하게 살아온 내 눈엔 그 거대한 건축물이 아무리 봐도 4인 가족의 집 같아 보이진 않는걸.
안녕, 페루에서 온 헤르미온느!
집은 대충 평으로 계산했을 때 건물 면적만 200평 조금 안되었다. 우리는 신혼을 20평이 안 되는 곳에서 월세로 시작했는데 말이다. 말 그대로 축구를 해도 되겠다 싶은 어마어마한 넓이였는데, 다행히 집이 친환경적인 목조 톤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전혀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온 집이 대리석으로 도배된 곳을 보면 왠지 모르게 바벨탑 같은 것이 떠오르며, 부담스럽고 불편하게 느껴졌는데 이 곳은 넓지만 쾌적하고 편안했다. 자연 나무 톤에 곳곳이 통 유리로 되어 있어서 채광이 잘 되었고, 그래서 왠지 자연과 어우러져 숲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자기 아버지가 목수라 직접 손녀들을 위해 만들어주셨다는 아이들의 침대마저 너무 취향저격이었다. 나는 나름 '미니멀리스트'라 자부하고 있기에, 내가 만약 돈이 아주 많다 할지라도 그런 넓은 집은 원하지 않는다고 확고하게 생각해왔었다. 불필요한 공간을 품고 사는 것은 자연에도 해악이며, 공간에 눌리는 기분이 들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대반전!그동안 제대로 된 넓은 집을 안 가봐서 그런 생각을 했었나 보다. 이 넓은 공간은 전혀 거북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공간에 있으면 글도 절로 나올 것 같고, 사람이 절로 선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가치관이란 것이 얼마나 불완전한 경험에 기반한 약한 것이란 말인가. 어휴, 우리 올해 안에 이사해야 하는데 우리도 마당에 사슴이 뛰노는 대저택으로 갈지 그냥 합리적인 타운 홈으로 갈지 고민할만한 재산이 없어서 천만다행이지 않은가. 하마터면 한참 고민할 뻔했지 뭐야.
기대했던 것처럼 그 완벽한 남편에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부인은, 미국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좋은 학군에 평점 엄청 높은 학교에 가면 이런 예쁘고 밝고 지혜롭고 사랑 많은선생님을 만날 수 있구나. 성급한 일반화를 하며 우리 아이들은 아직 학령기 아이들이 아닌데도, 선생님이라니 괜히 잘 보이고 싶어 졌다. 나는 뼛속까지 한국인인가 보다.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아이고 슨생님~'하며 치마를 펄럭일 뻔했다. 요새는 온라인 개학 덕분에 새로운 체험을 하고 있다며 조잘조잘 자기 학생들 이야기, 중학생이 된 자기 아이들 이야기를 해주는 부인 역시 참 사랑스러웠다. 가끔 나보다 어리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할 때면 골룸처럼 눈이 작아졌다가, 다시 따라 웃으며 동경의 눈빛을 보냈다. 오는 길에 사슴을 많이 봤다고 하니 사슴 수가 너무 많아 동네 안전사고 문제가 있다고 했다. 옆집 아저씨는 동네 사슴 개체수를 줄여야 해서 종종 마당에서 활로 사냥을 한다고 했다.뭐? 자기 마당에서 사슴 사냥을 한다고?? 그게 뭐야... 사극에서 보았던 조선 시대 왕들이 생각났다.
이야기는 즐거웠고 정말 오랜만에 엄마 아빠 아닌 사람들을 만난 우리 아가들은 신이 나서 그 200평 집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좀 뛰면 어떠랴 층간 소음도 없는걸. 그 넓은 집에 넷이 살기 적적하면 우리 가족이 그 집 지하에 들어가 살아 줄 수도 있는데...라는 생각을 하며 영화 '기생충'이 떠오르고 말았다. '돈이 다리미야, 주름살을 쫙 펴줘.' 하는 대사도 덤으로 떠올랐다. 나의 마음 어느 구석 꼬깃꼬깃 접힌 구김살을 직면할 때마다 외면하고 싶었지만, 한 편으로는 또 그냥 웃겼다. 그게 나인걸 뭐. 어휴 이 부부를 이제부터 독일에서 온 내 사촌 동생쯤으로 생각해야겠다. 그래야 배가 아픈 이유가 성립이 되지. 화기애애하게 한 참 이야기를 나누며 준비된 음식을 먹었다. 다행히 가져갔던 나의'Pa-jeon'은 인기가 많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우리의 가족의 인생 목표를 다시 세우고, 재무 현황을 다시 점검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괜히 의지에 불타 올랐다. 그리고 한국과 미국 양쪽 부동산 시세에도 밝아야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새삼 한국 경제란 기사들도 힐끔거리며 읽었다. 거기서 눈에 띈 기사 한 줄 '송파 헬리오시티, 2년 만에 8억 올랐다'. 뭐? 어떻게 2년 만에 8억이 올라? 헬리오시티 전세 가격을 찾아보고 나서 생각했다. 아니 완벽한 독일 아저씨, 그 어마어마한 대저택 팔아서, 강남으로 가시면 아파트 전세도 못 얻네? 하하. 우리는 깔깔 웃었다. 우린 도대체 얼마나 어마어마한 나라에서 이민을 온 거야? 아니 우리 주에서 제일 비싼 동네에 있는 대저택인데, 알고 보니 별거 아니잖아?! (아 물론 그렇다고 저희 소유의 헬리오시티 집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강남 집 값이 새삼 엄청나 보여서요.).
이렇게 버지니아 제일 비싼 학군의 대저택 방문기를 애정 가득 담고, 질투 약간 섞어 마무리해봅니다.열심히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