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이 의심스러울 때 윤이형의 「루카」를 처방합니다
1. y의 ‘깜박깜박’, 건망증인가 치매인가
-나 치매인가 봐.
y가 이렇게 말했을 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건성으로 대꾸했다. 워낙 뜬금없고 엉뚱한 y의 생각에 대부분 ‘내성’이 생겨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불 위에 냄비를 올려놓은 걸 깜박하고 세탁소에 다녀와서 냄비바닥을 홀라당 태워먹었다는 y의 하소연은 사실 우리 대부분이 한두 번쯤 겪은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자리는 순식간에 ‘건망증 배틀’이 되었다.
-냉장고 문 열고 한참 있어. 뭘 꺼내려 했나 까먹어서.
-현금인출기 앞에서 돈 꺼내는 걸 깜박하고 왔어. 나중에 은행에서 전화가 오더라.
수시로 찾아 헤매는 핸드폰과 자동차열쇠에 대한 원망, 쇼핑몰 주차장에서 차를 찾지 못해 머리가 하얗게 되었던 순간, 고유명사를 까먹고 ‘그거 그거 그거’하며 버벅거렸던 답답함 등. 40대가 넘은 중년인 우리들에게 이런 에피소드들은 나이 먹어가는 것을 실감하는 액세서리 같은 것이다. 나이 먹으니 ‘빨간색이 좋더라’ ‘자꾸 꽃 사진을 찍게 되더라’ 하는 취향의 변화처럼, 나이 먹으니 ‘자꾸 깜박깜박하게 되더라’는 일상적인 습관의 일부가 되었다.
대학 강사를 하는 나는 한 학기가 끝나갈 때쯤 거의 외운 학생들의 이름을 다음 학기가 시작되면 까먹는다. 강의실 복도나 교내매점에서 학생과 마주치면 ‘아무개야’라고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잘 지내지?”라고 말을 얼버무린다. 출석부에 올라있는 이름들은 비슷비슷해서 ‘서현, 나현, 세현, 세희……’ 잘못 발음하기 쉬운데, 간혹 잘못 부르면 학생들은 마치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한 것처럼 상처 받았다. 그래서 매번 출석부를 다시 확인하고 혀에 힘을 줘서 실수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름에 대한 ‘강박’ 때문인지, 학기가 지나서 학생들을 만나면 그 학생이 무슨 학과이고 기말에세이로 무슨 글을 썼는지도 기억이 나는데 이름만 생각나지 않는다. 환장할 노릇이다. 이것은 선택적 기억상실인가?
-또 냄비 태웠어. 집에 딸이 혼자 있다 놀랐다니까. 집안이 연기로 꽉 차서.
또 다시 냄비를 태워먹은 이야기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y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던 환절기라서 컨디션이 안 좋은 것인지, 혹은 다른 질병이 생긴 것은 아닌지 병원을 다니고 있다며 y는 한동안 외출을 자제했다. 갱년기증상으로 조기치매가 온 것이 아닌지 y의 걱정은 조금 더 심각해졌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y와 나는 나이가 한 살 차이다. 내가 학기마다 학생들의 이름을 헷갈려 하면서도 치매일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내 또래인 y도 치매일 리 없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그보다는 내가 그렇듯이 기억해야 하고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아지다 보니, 한 두 개쯤 빠트리는 것이 생길 수 있다고 보았다. 몇 년 사이 y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자식처럼 애지중지 기르던 앵무새가 세상을 떠났다. 그때 가족 모두 깊은 슬픔에 빠졌는데, 특히 남편이 힘들어해서 y는 여행도 가고 남편과 같이 시간을 보내려 애썼다. 그리고 따로 사는 시어머니가 신장투석을 시작해서 매주 한 번씩 병원으로 모시고 다녔다. 분당과 서울을 오가는 장거리 운전의 피로도 y의 건망증에 한몫을 했을 것이다. 또 y가 말끝마다 입에 달고 사는 외동딸이 그해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새로 알게 된 학부모들과의 관계나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도 아이 못지않게 y에게도 가중되었을 것이다. 나와 함께 나가는 모임에서도 y는 하던 일을 중간에 그만두게 되는 갈등과 불화를 겪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y가 뭔가를 깜박깜박 잊어버린다는 것이 ‘문제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y가 요즘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아져 마음고생이 늘었겠다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어림짐작과 진단이야말로 ‘절친의 견적’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y가 함께 보낸 세월도 어느 새 십여 년이다. 그런데 y의 일상을 훤히 꿰고 있는 것처럼 ‘아는 척’을 하고 나니……어쩐지 내 마음이 의심스러워졌다. 나는 정말 y를 잘 알고 있을까?
2. 우정에 ‘금’가는 소리, 친구인가, 이웃인가, 남인가
y는 ‘치매인가 봐’ ‘공부머리가 없어’처럼 자신을 단정 짓는 말들을 툭툭 던질 뿐, 요즘 자신의 심사가 어떤지 그 속내를 시시콜콜 말하지는 않는다. 나와 한 살 차이인데도, y와 나의 라이프스타일은 많이 다르다. 결혼을 일찍 해서 이미 아이들이 대학생인 나와 달리 y는 결혼도 늦고 아이도 늦게 낳았다. 나와 y의 출산과 양육에 대한 경험은 아이들의 나이 차이만큼 크다. 서른에 대학원에 진학해서 어떻게든 경력을 이어가려는 나와 달리 y는 유학을 다녀와서 MBA 학위가 있는데도 전업주부로 살고 있다. 한때는 꽤 이름이 알려진 홍보회사에 다녔고 진보정당에서도 일을 했다는 y에게서 ‘경력단절’을 아쉬워하는 소리를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근 3년 동안 y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번다한 일주일의 스케줄 가운데 y와 함께 하는 세미나는 나에게 우선순위 1위였다. 우리는 매주 하루는 같이 세미나를 하고, 수시로 세미나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에세이를 쓸 때는 한밤중에도 서로 ‘톡’을 날렸다. 우리는 만나서 스피노자의 철학이니 이반 일리치의 사상이니……하는 책 속의 말만 떠들어댄 것일까?
아주 사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엄마들이다. 우리 중엔 동화를 쓰는 사람도 있고, 번역을 하는 사람도, 외주 편집자도, 프리랜서 웹 다자이너도, 패션지 자유기고가도 있다. 유명인은 없지만 다들 쓰는 일에선 한 가락씩은 한다. 망해가고 있다고 알려진 한국 출판계 최후의 성실한 독자들이며, 팬들이며, 독설 넘치는 비평가들이기도 하다. (중략) 우리는 부당한 권력에 대항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리는 토요일마다 빈집에서 아이와 마주앉아 있는 사람들이다. 아이와 컬러링북을 칠하거나, 와서 김장을 하라는 시어머니의 급한 호출을 받고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나가고 싶으면 유아차라도 끌고 아이를 데리고 나가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러면 ‘맘충’ 취급을 받지 않겠느냐고 볼멘소리로 대답하면서도, 인파 속에서 밀리고 밟히다 아이가 혹시 다칠까 겁내는 마음이, 차가운 초겨울 바람이 아이의 볼을 꽁꽁 얼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실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나약한 핑계이고 열등감이 아닐까, 나는 실은 전혀 정치적 존재가 못 되는 게 아닐까, 자기검열을 하다 마음을 다친 채 새벽 두시에 책상 앞에서 맥주 캔을 따는 사람들이다.
(「작은마음동호회」, 『작은마음동호회』, 문학동네, 2019년, 9~10쪽)
소설가 윤이형의 최근 작품들은 나와 y처럼 함께 공부하거나, 인터넷커뮤니티 활동을 하거나, 페미니즘운동을 벌이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다. 최근작 『붕대감기』(마음산책, 2020년)에는 한 명의 남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기혼과 비혼으로 구분지어지는 고등학교 동창생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같은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는 엄마들의 친목, 미러링과 탈코르셋에 동의하는 헤어디자이너의 복잡한 심경, 교내 미투사건에 연루된 교수와 학생의 연대, 회사 선후배에서 생활 동반자로 관계의 전환을 모색하는 중년의 독신들 등. 『붕대감기』는 여자들의 이야기로 조각 맞추기를 한 모자이크화이다. 윤이형의 소설은 남자 대 여자, 이성애 대 동성애, 전업주부 대 워킹맘처럼 선명히 드러나는 대립보다는 그러한 분할선 위에 그어진 미세한 균열에 집중하고 있다. 그 미세한 균열에서 들려오는, 들릴락 말락 하는 작은 소리들은 윤이형의 신경줄을 곤두서게 한다.
그래서 윤이형은 친구라고 생각하고 동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마음의 ‘금’이 가는 균열의 순간을 불편하게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한 작품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작은마음동호회’는 윤이형의 태도와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 ‘우리’ 사이에 그어지고 있는 관계의 ‘실금’들을 대범하게 넘기지도, 문제를 명료하게 또박또박 말하지 못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그냥 넘길 수도 없는 ‘소심한’ 사람들의 마음의 요철(凹凸)을 핀셋으로 골라낸 듯 ‘콕’ 짚어준다. 윤이형은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게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하게 여자들의 우정을 말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윤이형의 우정은 다음과 같다. 같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편협함’과 ‘단호함’에 꾸준히 균열을 내는 일이다.
말을 할 때마다 상처가 생기지만 그래도 말을 건넨다. 화해나 행복이나 위로를 위해서는 아니다. 나는 우리가 왜 함께할 수 없었는지 정확히 알고 싶다. 우리가 서로의 어떤 부분에 무지했고 어떤 실수들을 했는지, 어떻게 해야 같은 오해와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지, 자세히 이야기 나누고 부끄럽게 적어두고 오래 기억하고 싶다. 함께하는 꿈을 꾸는 사람들은 우리가 마지막이 아닐 테니까.
나를 닮은 누군가가 너를 닮은 누군가를 언젠가 만나는 상상을 한다. 다르다는 것, 잘 알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그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영원히 등돌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의 어떤 시간들을 묶었다. 이 부서진 말들, 아직도 답을 모르는 질문들이 대화의 시작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작은마음동호회』, ‘작가의 말’ 중에서)
y의 치매 걱정은 문득 나에게 질문을 가져왔다. 나는 y를 잘 알고 있을까? 모르는 것일까? 나는 y의 친구인가, 이웃인가, 남인가? 이 곤란한 질문을 앞에 두고 나는 y와 이야기를 해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러고 보면 함께 중년의 시간을 공부로 보내고 있다는 각별한 동료의식만큼,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에티튜드’도 우리의 관계를 유지하는 안전거리였다.
3. y와 대화, 스토리의 빈틈들
-요즘 신경 많이 쓰는 일이 있었어?
-아니.
-그때 일을 중간에 그만두게 됐을 때 속 많이 상했지? 사람들의 쑥덕대는 소리도 듣기 싫고.
-위로해 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대놓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었어. 내가 또 이러쿵저러쿵 수다 떠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그때 에세이 쓰면서 마음이 많이 정리됐지.
그랬다. 공부를 좋아하는지 열심히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y는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에세이 속에서 풀어내려 애를 썼다. 공부가 모자라 시원스럽게 정리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러고 나면 한동안 몰두했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는 후련하다고 했다.
-그래서 공부하는 거구나! 나는 y가 뭔가 성취욕이 없어 보여서 남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내가 공부를 잘 했으면 벌써 그만뒀을 걸. 뭐가 뭔지 몰라서 계속하고 있는 거야.
세미나와 관련된 이야기만 하다가 그렇지 않은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하려니 어색했지만, y와의 대화는 나쁘지 않았다. 나와 알고 지낸 십년 이전의 y는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친구들이 있는지, 직장을 그만둘 때 괴롭지는 않았는지 등등 긴 ‘호구조사’의 시간을 가졌다. 진보정당에서 공공보육정책을 마련하는 일을 했는데, 정작 자신이 아이를 낳아서 키우려니 공공보육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y의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y는 무엇이든 명확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고 버티지만, 스스로 수긍이 가면 누구보다도 실행력이 뛰어났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알고 있는 y에 대한 정보에는 스토리텔링이 빠진 이력과 스펙만 입력되어 있었다. 그걸로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 직장, 집안일, 공부로 치여 사느라, 나와 같이 공부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증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대충대충’ ‘건성건성’ 알아도 유지될 수 있는 관계를 ‘문제’라 생각하지 못했다.
지난 겨울 y는 바빴다. 매일 매일 처리해야 할 일들을 해치우느라 정신 바짝 차리고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느라 ‘치매 걱정’은 쏙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바쁜 일정 사이사이 우리는 한두 번 더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당시 읽고 있던 윤이형의 소설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y는 유학시절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불운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더 다가가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했고, 공부한답시고 멀어진 친구들을 그리워했다. y는 인간관계에서 ‘안달복달’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매일 매일 해치워야 할 일이 많아진 지난 겨울의 스케줄은 y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만들어진 결과였다. 바쁜 y를 붙잡고 가끔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문득문득 중년 여자들의 우정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뾰족한 결론은 없다. 그런데 아주 작은 변화는 있다. 내가 내 또래인 y가 나와 비슷하리라 짐작하고 넘어갔던 일들에 대해 y는 어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이야기를 할수록 ‘엉뚱하다’ 생각했던 y의 캐릭터가 조금은 이해됐다. 물론 이야기를 나눈 시간만큼 정비례로 이해도가 높아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반비례로 불일치하는 것도 아니니 낙담할 일도 아니었다. 우리는 이해와 오해 언저리를 오가며 서로에 대한 데이터를 쌓아가고 있다.
루카, 나는 너에게 네가 왜 루카인지 묻지 않았다. 예전에도 지금도 나는 그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 역시 내가 왜 딸기인지는 묻지 않았으니까. 나는 이제 너와 함께가 아니고 여전히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은 채 살아간다. 어떤 일들은 그저 어쩔 수 없고 어떤 일들은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으며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 그저. 그럴 수 없다. 삶이라는 이름의 그 완고한 종교가 주는 믿음 외에 내가 다른 무언가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내 믿음을 지켰고 너를 잃었다. 그 사실이 가끔 나를 찌르지만 나는 대체로 평안하다. 그런데 루카, 너는 어떠니. 너는 그곳에서 평안하니. 루카였고 예성이었던 너는.
(「루카」, 『러브 레플리카』, 문학동네, 2016년, 150쪽)
「루카」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두 사람, 루카의 연인이었던 딸기와 루카의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연애의 실패담이다. 가장 루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자부하는 두 사람에게 루카의 상실은 헤아릴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남긴다. 그런데 나는 이 새드엔딩이 해피엔딩보다 긍정적으로 느껴진다. 루카의 상실을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공백’으로 비워둠으로써 이들의 연애담은 ‘끝나지 않는 이야기’가 된다. 내가 아직 모르는 y의 이야기와 그 공백도 그러하다고 생각된다. 나는 십년간 같이 공부한 y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러나 모른다는 사실은 ‘끝’이 아니다. 그 공백과 균열의 틈새로 우리의 우정이 물들어가기를 기대해본다. 최근 문학상 운영과 관련해서 ‘절필’을 선언한 윤이형 작가에게도 나의 우정이 전달되기를 기대해본다. 나는 독자로서 우리의 ‘편협함’과 ‘단호함’에 균열을 만드는 윤이형의 소설이 계속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치매로 시작했지만 우정에 대한 처방전으로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