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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약방 Oct 24. 2022

Nobody or Somebody, 기어 변속의 기술

-알코올의존증에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처방합니다

  1. 진단의 어려움무엇이 문제인가

  코로나19의 여파로 감자탕집에는 사람이 미어터졌다.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과 재택근무를 실시하는 직장인들이 많아지면서, 각 가정에서는 매끼니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고난도 미션이 주어졌다. 가족들이 돌아가며 집밥을 해먹기도 하고, 편의점이나 홈쇼핑에서 판매하는 간편식이나 반조리 식품으로 때우기도 했다. 또는 오늘은 짜장, 내일은 치킨을 주문하는 ‘배달의 민족’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주말이 아니라도 가족끼리 외식으로 한 끼를 해결하는 가정이 늘어났다. 적어도 5월 첫 번째 월요일 점심시간에 우리가 들어간 감자탕집은 외식 나온 가족들로 북적거렸다.

  코로나로 수업이 줄어든 재수학원 강사 자룡과 그의 초등학생 아들, 자룡의 지병에 대한 처방을 의뢰받은 나와 내가 끌고 나온 친구, 흡사 가족처럼 보이는 우리 네 사람은 그날 휴대용 가스버너 위에 감자탕중자 냄비를 올려놓고 마주앉았다. 테이블에는 소주 한 병과 맥주 한 병, 그리고 학교에 가지 못 하는 동안 게임, 마술, 인형 뽑기 등등 소일거리 찾기에 매진하고 있는 초등학생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주문한 사이다 캔이 정답게 올라와 있었다. 자룡이 의뢰한 지병은 ‘알코올 의존증’이었는데, 그날의 상황을 보라. 이건 알코올 의존증을 해결하고자 모인 사람들의 자세가 아니다. 이건 누가 봐도 한 번 제대로 마셔보자는 의욕으로 넘치는 ‘낮술’의 현장이었다. 나는 알코올 의존증은 ‘페이크’이고 자룡이 해결하고 싶은 다른 고민, 갈등, 번뇌 등등의 애로사항이 따로 있으리라 짐작했다. 무엇이 자룡을 괴롭게 하고 병나발을 불게 만드는 것인가? 그러니까 알코올 의존증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로 봐야 한다.

 “따로 학원을 차릴 생각이라며…… 지금 다니고 있는 학원은 그만둘거야?”

  “지금 학원에서 나보다 더 오래된 강사가 없어요. 나한테 맞게 세팅해놨는데 왜 그만둬요? 학원 문 닫을 때까지 있어야지. 월급 따박따박 나오고 좋은데.”

  경력 15년이 넘어선 베테랑강사 자룡이 최근 학원일로 괴로워한다는 풍문이 나에게 들려왔다. 그쯤 되면 자기 학원을 운영하고 싶다는 포부를 가질 만한데, 경영자가 된다는 건 또 리스크가 따라오는 일이니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많으리라 나는 예측했었다. 그런데 아니란다. 고정수입이 보장되는 지금의 학원을 유지하며, 마음에 맞는 동료들과 자신들이 해보고 싶은 방향으로 학원을 하나 따로 차리는 것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새로 차릴 학원에 대한 계획을 얘기할 때 자룡의 눈빛은 빛났다. 학생들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앱을 개발하고 통계 분석에 기반한 합리적인 로드맵을 학생들에게 제시하겠다는 야심찬 계획만으로도 그는 자신감이 ‘뿜뿜’ 넘쳤다. 야구선수들의 타율과 팀별 승률을 달달 외우며 야구에 대한 지식을 뽐낼 때, 어깨에 힘이 ‘빡’ 들어가는 그의 초등학생 아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은 소주잔을 한 사람은 사이다잔을 들고 있다는 차이 정도.

 “저는 지금도 강의할 때 땀을 뻘뻘 흘려요. 학생들은 그런 저를 보고 열정적인 모습에 감동받았다고 하는데, 사실은 긴장해서 그런 거예요. 강사일이 잘 안 맞아요. 처음 시작할 때 3년만 하자 생각했는데, 3년……3년 연장돼서 지금까지 왔죠.”

  이때쯤 초등학생은 문방구에 다녀오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자신의 아버지가 곤혹스러워한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어른들 편하게 이야기하라고 알아서 자리를 피해줬다. 밤톨만한 녀석이 기특하다. 어디선 이런 매너를 배운 걸까? 자룡이 강사로서 자신의 자질 없음을 토로하고 있을 때, 나는 그의 아들을 신통방통해하며 그의 말을 건성으로 들었다.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질이 없는데 한 직업을 15년 이상 유지할 수는 없다. 어떤 직업이든 그것에 맞는 직업의식과 재량이 필요하고, 15년 이상 그 일을 유지해오고 있다면 그에게 그것이 없을 수가 없다. 학생들 앞에서 ‘떠는’ 일은 그가 불안하고 초조해서가 아니라 ‘열의’를 갖고 수업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준비해서 보여주려 할 때 우리는 긴장되고 떨린다. 그게 설렘이고 ‘살 떨리는’ 재미이다. 이런 긴장과 설렘이 없어질 때, 그때야말로 그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러니 강사로서의 자질 없음이 그의 스트레스의 원인은 아니다. 그럼 뭐가 문제일까? 진단의 어려움으로 우리는 소주를 한 병 더 시켰다. 

  “이제 더 이상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잖아요. 지금 시작하려는 학원 일도 패배자의 자기합리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멋있고 훌륭한 일이 뭔데?”

  “누구는 교수도 되고 변호사도 되고 폼 나잖아요.”

  자룡이 말하는 ‘폼’ 나는 일에는 정당 정책연구소의 노동문제 연구원도 있을 것이고, 대안적 삶을 실천하는 비판적 지식인도 있을 것이고, 척하니 기부금을 쾌척하는 금수저도 있을 것이다. 작품성이 뛰어난데 흥행에도 성공하는, 기가 막히게 운이 좋은 영화감독이 되는 일과 같은 것. 나도 그런 꿈을 꿨던 사람이라 덩달아 심란해졌다. 감자탕 국물은 냄비바닥까지 졸아붙어 있고, 술병은 빠른 속도로 비워졌다. 문방구에 갔던 초등학생이 돌아오자 우리는 불콰해진 얼굴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떻게 이렇게 시간을 딱 맞춰 왔어!”

  우리도 그날 우리를 따라왔던 초등학생처럼 매일 ‘칭찬’ 받는 날들이 있었다. 밥을 잘 먹어서, 떼를 안 써서, 학교에 잘 가서, 친구랑 잘 놀아서, 대학에 척 붙어서……. 그런 ‘좋은’ 날들이 다 지나갔다.      

 


 2. 인정욕망, Somebody or Nobody


   나 역시 국내에서 여러 권의 책을 내고 작가로서 자리를 잡은 후에는 여행을 떠나는 마음이 습작생이었던 시절과는 달라졌다. 서점에 가면 좋은 자리에 내 책이 놓여 있고, 꾸준히 내 책을 읽어주는 독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해외에 나가면 여전히 나는 노바디였다. 2003년에 아이오와 국제 창작 프로그램에 참가했을 때, 나는 서른다섯이었고 작가가 된 지 구 년째였지만 해외에서 나온 책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프랑스어판밖에 없었다. 그 후로 세월이 십 년쯤 더 지났을 때는 상황이 더 나아졌다. 이제 영어판으로 나온 책도 여러 권이 되었고, 그 밖에도 여러 언어로 소설이 번역되어 여행지의 서점 외진 구석에서라도 내 책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노바디라는 느낌은 여전했다.

 (『여행의 이유』, 문학동네, 2019년, 163~165쪽)     


  “가끔은 주목받고 싶은 생이고 싶다”는 시집의 제목처럼, 나는 ‘인정욕망’은 우리 모두를 살아가게 하는 기본적인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인정욕망이 자신을 과도한 경쟁심과 성취욕으로 몰아가지 않는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정욕망이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아니냐 조언하려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사래를 치며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이건 아마도 자신은 성공에 눈이 멀거나, 과시욕에 넘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눈에 띄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노바디’의 삶을 지향하고 있는 것일까? 가끔은 누구나 알아봐주는 스페셜한 ‘썸바디’가 되고 싶을 때가 없을까? 가끔은 자신을 성별, 나이, 직업이 아닌 자신만의 ‘고유함’으로 구별지어지기를 욕망하지 않는가? 나는 ‘실패자의 자기합리화’라는 말에서 진단하기 어려웠던 자룡의 ‘아킬레스건’을 발견했다. 가끔은 썸바디가 되고 싶은 노바디의 우울함이 느껴졌다. 

  김영하는 산문집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자가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을 ‘노바디’와 ‘썸바디’라는 표현을 통해 적절하게 설명해준다. 우리는 때로 지금의 정체성에 벗어나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낯선 곳에서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여행이 인생에 대한 오래된 ‘비유’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노바디와 썸바디를 오고가는 여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타케의 왕이고 트로이의 영웅인 오디세우스도 바다 위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자’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순간순간 자신의 존재감을 낯선 이방인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했고, 그 허영과 자만심이 위기를 가져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십 년이나 지연시켰다. 김영하는 말한다.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허영과 자만심이 가져온 위험을 겪으며 신중해지고 겸손해지는 사람으로 성장해가는 이야기라고. 허영과 자만심이 아니라 신중함과 겸손함이 오디세우스의 이름을 찾아주었다. 그러니 썸바디가 되고 싶으면 오디세우스처럼 스스로를 낮추는 노바디로 움직여야 한다고. 혹은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시간들을 꿋꿋하게 보내야 한다고.      


  돌아보면 내 인생은 온갖 중독과의 싸움이었다. 십오년을 피우던 담배를 끊는 데 겨우 성공한 것은 서른세 살 때였다. 그전까지 침대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골초였다. <빛의 제국>을 쓰던 2006년 무렵에는 매일 밤 위스키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를 만들어 마셨다. 그래야 잠이 들었다. 이 버릇을 고치는 데에도 또 몇 년이 걸렸다. 컴퓨터 게임들에도 쉽게 중독되었다.(중략)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야 그 시기에 내가 겪은 것이 단순한 게임 과몰입이 아니라 가벼운 우울증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던 시절이면 나는 무엇에든 쉽게 중독되어 자신을 잊기를 바랐다. (같은 책, 178쪽)     


  이제 자룡의(그리고 나의) 알코올 의존증은 조금 설명이 된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자’로 자신이 규정되는 것을 잊기 위해 도피처를 만는다. 술/담배/게임/쇼핑/여행 기타 등등 우리가 빠져드는 아름다운 것들. 내가 어려운 철학책 속으로 파고들어갔다면, 자룡은 멕시코, 쿠바, 아르헨티나, 칠레, 볼리비아 등 지구 반대편의 남미로 날아갔다.      



  3. 자룡의 세계 테마 기행’-남미편

  자룡은 최근 몇 년 사이 두 번이나 남미로 혼자 여행을 다녀왔다. 그것도 한 달씩이나 장기여행으로. 여행을 준비하며 라틴댄스학원을 다녔다는 말을 듣고, 나는 그가 여행준비와 계획을 철저히 짜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란다. 몇몇 일정과 숙소 예약을 제외하곤 대부분 비워진 채로 그냥 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일정과 코스가 바뀌는 게 재미있고, 일정이 안 맞아 하루 이틀 할 일 없이 빈둥대거나 멍 때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자신이 즐긴다는 사실도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그는 기뻐했다. 

  “한 번은 저녁에 도미토리에서 사람들과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저는 다음날 가볼 관광지의 차편을 알아보고 있었어요.”

  나는 뭔가 극적인 전개를 기대하며 자룡을 쳐다봤다. 지구 반대편까지 갔으니 아즈텍의 신비, 삼바의 정열, 안데스의 별빛, 이과수폭포의 장엄함 같은 경이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때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저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너 뭐하니?” 그래서 내일 차시간을 알아본다고 했더니, 소리를 빽 지르는 거예요. “왜 내일 걱정을 해? 맥주 마셔! 지금 맥주 마시는 시간이잖아.””

  이 한 마디가 자룡에게 각성을 가져왔단다. 아마도 짧은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다 보니 더 강한 임팩트가 전달되지 않았나 싶다. 자룡의 ‘세계 테마 기행-남미편’은 천연조미료를 넣어 요리한 음식처럼 ‘건강한’ 심심한 맛이 났다. 유명 관광지를 굳이 가보려 하지 않았고, 시장을 구경하며 뭐든 사먹는 게 재미있었고, 남미 사람들의 여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고. 그들에게 자신이 가지지 못한 ‘낙관’ 같은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그날그날을 사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그날그날 그냥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돌아오니, 학원에서 만나는 학생들도 조금은 달리 보였다고 한다. 왜 저렇게 공부를 하지 않을까……예전에는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말을 거니 학생들도 선선히 자신에게 마음을 보여주었단다. 이 무슨 ‘EBS'스러운 전개인가? 

  아르헨티나의 쇠고기와 와인이 싸고 맛있었다는 자룡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왜 알코올 의존증을 걱정해? 사회생활에 지장을 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닌데?”

  “나쁘지 않은데, 내가 술을 안 마시면 이야기를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요, 술이 있어야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자유롭지 않다는 거잖아?”

  도대체 왜 자룡은 나에게 알코올 의존증에 대한 처방을 의뢰한 것일까? 내가 보기에 알코올 의존증을 염려하고 치료해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나다. 나는 아직 알코올 의존증을 치료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만성질환 수준인데, 그는 이미 자신의 음주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자기 객관화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나도 철학책 속으로 파고들어갈 것이 아니라 집 밖으로 여행을 떠나야 했을까? 술은 ‘해방’의 상징인데, 그는 해방이 아니라 ‘자유’를 말한다. 왠지 그는 ‘썸바디’고 나는 ‘노바디’로 밀리는 기분이다. 

  그러나 나에게도 그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인생을 자동차라고 비유해보자. 자동차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기어’를 변속해야 한다. 잘 나가고 싶다고, 기어를 주행(D)에만 놓고 운전할 수는 없다. 후진(R)도 해야 하고 평행(N)에도 놓아야 하고 운전을 마칠 때는 항상 주차(P)에 기어를 위치시켜야 한다. 기어가 주행에만 가있는 자동차는 쓸 데가 없다. 그러니 인생에는 썸바디의 날도, 노바디의 날도, 음주의 날도, 여행의 날도, 그리고 그 밖에 ‘한 눈 팔 것’들이 모두 필요하다. 적절하게 변속할 수 있는 재량과 함께. 

  나보다 더 잘 기어를 변속하는 자룡이지만, 문학처방전답게 앞으로도 그의 여행이 순조롭기를 기원하며 김영하의 문장들을 옮겨 적어본다. 아마도 그는 노바디의 우울이 심해질 때 다시 가방을 싸서 보다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길로 걸어가리라.      


  실뱅 테송의 말처럼 여행이 약탈이라면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하러 그 먼길을 떠나겠는가.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같은 책, 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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