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들이 5개월이 넘자 손을 제법 잘 사용한다. 점점 잡는 힘도 세지고 물건도 정확하게 잡는다. 아기 앞에 손을 펼치면 양손으로 내 손가락을 하나씩 움켜쥐고 가지고 논다. 아기 왼손에 내 검지, 아기 오른손에 내 약지. 그리곤 엄마 손인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내 손가락을 사정없이 당겨버린다. 아가야, 엄마 손은 실리콘 장난감처럼 탄력성이 있지 않아. 아가야, 관절은 그 방향으로는 구부러지지 않아. 하하하. 아야 아야 으악. 나는 이걸 ‘손가락 능지처참 놀이’라고 부른다.
출산하기 전까지는 아이들과 어떻게 놀아줘야 되는지 통 감이 없었다. 어느 개월 수가 되어야 기는지, 언제부터 엄마 아빠는 알아보고 말을 트는지 등을 몰라 자녀가 있는 친구와의 대화에서도 나는 삐거덕거렸다. 조금 더 큰 어린이들에게도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어려웠다. 오는 길은 편했나요?, 요새 어린이집은 별일 없고요? 와 같은 질문을 건넸는데 왜인지 대화로 이어지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취조하는 그림이 되었다. 난 재미없는 어른이었다. 하지만 조금 관찰해 보고 파악한 한 가지는, 어린이들에게 아기 말투로 말을 걸면 의아해한다는 것이었다. 자기는 다 커서 아기가 아닌데 아기 취급을 한다고 말이다. 아 그렇지. 어리다고 다 아기는 아니지! 하루가 다르게 더 많은 것이 보이고, 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데! 아동의 범주에 드는 인간에 대한 자세한 관심이 없었던 탓이다.
재미없는 어른이다 보니 아이들과 대화하다 보면 서로의 텐션이 떨어진다. 하지만 아이들의 격한 반응을 억지로 끌어내기 위해 아이를 놀리지는 않으려 한다. 어른들은 아이를 놀리기 좋아한다. 아이가 울거나 크게 반응하는 모습이 귀여워 보이기 때문일 거다. 아니면 그것이 아이와 놀아준다고 생각해서인 것도 같다. 어른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장난이지만, 어른이 마음먹고 놀리고 짓궂게 대한다면 아이도 그것을 재미있어할까? 친구가 놀리고 성가시게 해도 골치 아픈데 어른이 그런다면 아이는 당혹스러울 뿐이다. 내가 어릴 적 느꼈던 기분이 아직도 생각난다. 어른에게 그만하라고 떼를 쓸 수도 없고 다른 어른들도 장난이라며 웃고 있어 나 혼자 울어버릴 수도 없는 그런 기분 말이다. 어른은 상황이나 말을 만들어내서 어린이를 쉽게 당황시킬 수 있다. 어린이도 할 수 있긴 있지만 어느 쪽이 만들어낸 허구가 더 진짜 같을까. 어른들의 장난에 아이가 놀아나는 것이 하나도 재밌지 않은 건 아동이 성인과 대등한 위치가 아니기에 그렇다. 성인이 회사 상사나 어려운 친척 어르신을 골탕 먹이지 않는 것을 생각해 보면 골탕 먹이는 대상이 약자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어른의 성숙한 인지력과 사고력을 아이들의 천진한 세계를 조작하는데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와 어떻게 놀아주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비록 재미는 없더라도 아이에게 예의 바르게 대하는 것이 어른이 보일 수 있는 최선의 태도이다. 모두가 재밌는 사람이 될 필요도 없고, 어른 즐겁자고 아이에게 당혹감을 줄 필요는 더더욱 없다.
개천절 연휴 동안 엄마가 와계시기로 했다. 마침 아가들이 낯을 가리기 시작해 오랜만에 외할머니를 보고 아가들이 많이 울면 어쩌지 걱정이 됐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온 낯선 사람을 보더니 눈은 휘둥그레지고 동공은 흔들리고 입은 울까 말까 고민하느라 삐죽삐죽거린다. 다행히 조금 울먹이다 금세 풀어졌지만, 엄마도 내심 삐죽거리는 귀여운 표정을 또 보고 싶은 것 같았다. 놀리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아이들의 다양한 감정 표현은 아무래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통통한 볼도, 작은 손도, 뒤뚱거리는 발걸음도 눈을 떼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유튜브만 봐도 아이들을 찍은 콘텐츠가 많다. 신생아적부터 아가들의 일상을 찍은 브이로그가 넘쳐난다.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 모두 아이들을 애정 하는 마음일 것이라 믿는다. 게시물에 눌려있는 하트 수를 보면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은 것 같은데, 또 아리송하다. 밖에 나가면 어린이들의 입장을 막는 노 키즈존 카페나 식당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영상과 사진 속에 정제된 아이들의 모습은 봐줄 수 있지만 사회 구성원으로서 같은 장소를 공유하기엔 난감한 걸까?
노 키즈존엔 영업 공간이 위험하니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출입을 막는다는 점잖은 문구가 주로 명시되어 있다. 어린아이는 이 영업장에 오기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이다. 영업장에서 다른 고객에게 불편을 주거나 행동이 미숙해 보호가 필요한 건 어린아이뿐이 아니다. 장소에 걸맞은 매너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라도 폐를 끼칠 수 있고, 몸이 불편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장소 이용에 도움이 필요하다. 노 키즈존으로 지정하기까지 사장님들 입장에선 어린이를 동반한 손님들로 인한 고충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페나 식당을 운영하면서 본인이 선호하지 않는 모든 인간 집단을 명시해가며 출입을 금지하지 않는다. 특정 정치 성향, 특정 종교인, 특정 성별과 연령대가 경험상 골치를 많이 썩였다고 해서 그들이 애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게 대문에 내걸 수 있는지. 어린아이와 양육자에게는 할 수 있는 말을 그들에게 하지 못하는 이 간극에는 어린이와 양육자(주로 여성)가 통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오만함과 그들에 대한 혐오 의식이 깔려있다. 누군가의 출입을 금지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은 본인의 혐오가 얼마나 짙었는지 모르기에 가능하다. 아이들이 속해 있는 세상은 어른들이 속해있는 세상과 다르지 않다. 아이들은 놀이터나 유치원, 어린이집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보호자들의 활동 반경에 함께하며 사회를 엿보고 세상을 배운다. 아이들의 귀엽고 이쁜 장면이 담긴 영상의 높은 조회 수와 노 키즈존이 양립하는 세상은 아이들을 오락으로만 소비하는 세상이다. 이 세상에서는 그들을 사회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그들을 양육하는 보호자들도 소외시킨다.
노 키즈존으로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을까? 되려 은연중에 아이들을 오락거리로만 바라보는 우리 안의 시선을 반성하는 게 아이들 보호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요즘엔 유튜브에 데뷔하는 것이 아이들의 로망이라고 한다. 어린 나이부터 유튜브를 시청하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이 결정한 일이 초래할 부작용을 미리 예측하기 어렵다. 많은 조회 수를 이끌어내기 위해 어른이 조작한 상황 속에서 아이가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느끼게 되진 않을까. 필요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어 무작위 한 타인의 반응을 접하게 되는 것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 염려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새로운 플랫폼이 등장할 때마다 아이의 이용을 막고 터부시 할 수는 없기에 어른들의 고민이 더 필요하다. 역시나 모든 카페나 식당이 놀이터처럼 안전할 수도 없다. 아이들의 경험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현명한 지도가 아이들을 보호하고 성장시킨다. 아이들은 어디에든 존재할 수 있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혀주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