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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느무느 Oct 27. 2022

집남소 (집에 있는 남편을 소개합니다.)

나는 잠이 너무 소중하다. 이런 고백은 좀 부끄럽다. 밥벌이 하러 회사에 다니고 밤낮없이 아기들을 돌보아야 하는 사람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진지하다. 회사를 다니기 전에도 아이를 낳기 전에도 웬만한 수면시간은 내 갈증을 해소시키지 못했다. 아마 내 허벅지 근육량을 비롯한 체성분 상태와 연관이 있을 거다. 체력이 형편없기에 많이 자야 그나마 사람 구실을 한다. 와중에 불면증도 있다. 잠들기 어렵다 보니 잠에서 깨는 것은 더욱 싫다. 어떻게 든 단잠인데. 엄마가 되어도 똑같다. 나는 잠이 많은 엄마가 되었다. 어쩌면 가족이라는 생태계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별종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아직 도태되지 않고 엄마 노릇을 잘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아빠가 잠을 덜 자주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나뿐이다. 남편이 집에 있어서 집안일에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게 되었다. 부부 중 아내가 집에 있으면 많은 설명이 필요 없지만, 남편이 집에 있다고 하면 듣는 이의 머릿속에는 다양한 의문이 생긴다. 상대가 예의상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내 눈에는 머릿속 물음표가 보이는 듯해 나도 변명처럼 설명을 덧붙인다.


남편은 몇 년 전 회사를 그만두었다. 가상화폐가 연일 신고가를 갱신하며 폭등하던 때였다. 주변에 코인으로 몇억 원을 벌었다는 직장인들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왔고, 코인 파이어족에 대한 뉴스도 많이 나왔다. 남편도 그즈음 퇴사했다. 안타깝게도 가상화폐로 돈을 벌어서 은퇴한 것은 아니었다. 여러 이유로 회사가 인생을 좀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가 힘들 때 퇴사만이 답이 아닌 걸 우리 둘 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회사 내 조밀한 상하관계에서 오는 말도 안 되는 갑질이 하루아침에 없어질 순 없었다. 자신이 당했기 때문에 위로 올라가면 누려도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둘 다 직장 생활이 녹록지 않았지만, 배우자의 매일매일이 나보다 비참한 것을 지켜보는 게 더 힘들었다. 그에게 퇴사를 적극 권했다. 은퇴 후에 할 고생을 미리 해서 회사에만 의존하지 않는 삶을 설계하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여러 가지 시도 끝에 그는 직무를 살린 프리랜서 일을 비롯해 N 잡러로 자리 잡았고 육아휴직 중인 나와 함께 풀타임 육아를 담당하고 있다.


집안일과 육아에서 체력 강도가 높은 것은 남편이 담당하고 있다. 나는 출산 후 몸도 많이 약해졌고 남편은 출근할 일이 없으니 당연한 배분이다. 육아에서는 밤 육아와 목욕을 남편이 담당한다. 남편이 아가 둘을 데리고 자다가 새벽에 나와 교대한다. 아기 목욕도 출산 후 손목이 약해진 나를 대신해 처음부터 남편이 담당했다. 하지만 사소한 것까지 목록화해서 담당자 이름을 붙여놓을 수 없다. 언제나 할 일을 서로에게 미루지 않는 자세가 제일 중요하다. 언제든 내가 조금이라도 편한 것은 상대 덕분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남편이 모든 일을 열심히 해주기에 내가 잠도 더 자고 쌍둥이 육아도 잘 지탱되고 있다. 마치 시소와 같다. 내가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이유는 상대가 깊이 주저앉았기 때문이다. 내가 몇 시간 더 눈 붙일 수 있는 이유는 남편이 그만큼 더 깨어있기 때문이다. 어른끼리만 살면 대충 해도 되지만 아가들 일은 미룰 수 없는 것이 많다. 우리 둘 다 지치지 않고 오래가려면 서로 다독이며 상대가 크게 주저앉지 않도록 내가 손과 발을 더 많이 움직여야 한다.


남편이 집안 살림하고 육아하는 모습을 본 어르신들은 남편을 칭찬하곤 한다. 아기를 잘 보고 집안일도 잘한다고. 나도 남편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좋은 파트너여서 고맙다는 뜻이지 내 일을 대신해 줘서 고맙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편이 하는 만큼 한다고 칭찬받을 것 같진 않기에 남편이 행위에 비해 가져 가는 공이 크다고 느낀다. 내가 하면 당연한 고생이지만, 남편이 하면 대단한 기여가 된다.


난 집안일이나 육아에 있어서도 남녀 간 실력 차이가 있을 리 없다는 급진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대부분의 가정에서 남편의 집안일 수행능력은 아내의 기대에 영 미치지 못한다. 내 남편도 결혼 초반에는 종종 나를 놀라게 했다. 신혼 초 남편에게 요리에 쓸 오징어를 씻어달라고 했는데 뜨거운 물로 씻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손이 시려서 그랬단다. 오징어를 손질하기도 전에 오징어 살이 약간 불투명해진 것 같았다. 이젠 기본기가 쌓이긴 했지만 요리할 때마다 나에게 뭘 자꾸 물어본다. 여기는 내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이고 우리 주방인데 왜 자꾸 나를 찾나요. 이제 좀 알아서 해야 하지 않을까요. 유독 남편의 주방일 앞에선 엄격한 꼰대가 되어버린다. 가까이서 보면 내 성에 안 차는 부분들이 있음에도 남편을 추켜올리는 시선을 많이 접해서 그렇다.


이제는 나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었다. 남자들이 왜 집에서 분리수거와 음식물 쓰레기를 주로 담당하게 되는지 말이다. 그 이상의 섬세한 일에 있어서는 영 좋은 점수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분리수거하는 날 밤이면 남자들이 층층마다 분리수거 쓰레기를 잔뜩 들고 엘리베이터에 탄다. 한 번은 남편이 분리수거하러 나가는데 어떤 아저씨가 양손 가득 쓰레기를 들고도 짐이 넘쳐서 두 발로 스티로폼 상자를 뻥뻥 차면서 가더란다. (혼자서 들 수 없는 양임에도 아저씨 혼자 나왔다는 게 나의 웃음 버튼이다. 그것까지 도와주면 그가 하는 일이 너무 없어서 그런 거겠지 싶다.) 남편이 그 아저씨 짐을 같이 들어줬다고 하던데, 남자들도 나름 집안일에 있어서 연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자들은 이런데서나 연대하면 좋겠다. 나약하게 정수기 물통 가는 일과 우유 당번 맡는 것에 대해 불평하지 말고.


육아는 우리 둘 다 처음이기 때문에 그래도 집안일보다는 남편에게 맡겼을 때 답답한 부분이 적다. 밤 육아와 목욕 외에 분유, 기저귀, 물티슈 등의 재고관리와 주문은 남편이 전담하고 있다. 예방접종과 어린이집 대기 순번도 남편이 챙긴다. 나에게 이런 것들은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와 같은 성격의 일로 보이지만 어떤 어른들에겐 깜짝 놀랄 일일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집에 있고 엄마는 잠이 많은, 조금은 별난 상황이기에 가능할 수도 있다. 그 덕분에 남편은 신생아적부터 아가들을 돌보며 그들의 성장을 함께하고 있다. 부모 중 누군가는 생계를 위해 일터로 나가야 하기에 육아에 두 명 다 참여하기 어려운 게 보통의 현실이지만, 어떤 형태로든 두 양육자가 육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 볼 수 있다. 육아 참여도가 높은 남편과 함께 사는 게 대단한 행운으로 여겨지지 않는 세상이면 좋겠다. 덕질하는 엄마, 잠이 많은 엄마와 같이 가족 생태계에 다양한 엄마 종(種)이 출현하길 기다린다. 그러기 위해선 엄마 혼자 시소에서 발을 구르는 것이 아니라 아빠들이 공동 양육자로서의 본분을 다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엄마들도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잃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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