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까지는 아이를 언젠가 낳을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 당연했던 생각에 의심을 품고 돌아보게 된 것은, 내가 임신하고 출산하는 게 자연스러울 나이가 될 때쯤이었다. 그냥 머릿속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진짜 진짜 내가 출산하게 될 수도 있게 되니, 아이를 낳고 싶다는 마음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과연 내 체력과 정신상태로 아이를 건강하게 양육할 수 있을 것인가. 나 또한 출산과 육아 후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것인가. 난 당장 피부병으로 스테로이드 약도 발라야 하고, 비염 알레르기 약도 먹어야 하고, 도수치료도 받아야 하고, 항우울제도 먹어야 하는데 이 모든 현대의학에 의존하지 않고 임신 기간 10개월을 버틸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내 삶의 질이 떨어질까 봐 두려운 것이 컸다.
이에 만만치 않게 임신을 망설이게 했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페미니즘. 페미니스트가 되면서 여성에게 기대되는 여러 역할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이중잣대들, 여성에게만 과하게 요구되는 특정 역할들을 보게 되었다. 그중 엄마로서 요구되는 과한 희생은 이미 알고 있던 부분이지만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자부하면서 내가 엄마가 된다는 것은 어딘가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임신과 출산이 여성이 할 수 있는 가장 존엄한 일인 것처럼 여겨지는 시선도 왜인지 싫었다. 여성은 단순히 재생산을 위한 존재가 아닌데? 난 엄마가 되지 않고도 남성들처럼 (가부장제) 사회에서 인정받고 내 삶을 보람차게 살아갈 수 있을 텐데? 그리고 어디선가 다른 페미니스트들의 원성도 들리는 것 같았다. 결국 페미라는 너도 결혼하고 출산해서 전통적인 역할을 수행하러 간다고. 아무도 나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지 않았지만 페미니즘 과몰입러인 내 안의 어떤 목소리가 계속 나를 고민하게 했다.
그 외에도 내가 찾은 이유는 너무 많았다. 기후위기와 환경오염을 비롯해, 저출산으로 노령인구 부양 부담이 커지는 것 까지도...
엄마가 된다는 생각을 하면, 어김없이 유아기 시절 엄마와 보낸 시간들이 떠오른다. 엄마 손 잡고 같이 시장을 돌아다니며 장 본 기억, 돈가스를 해주려고 고기에 달걀물과 빵가루를 묻히던 엄마 모습, 저녁 준비하는 엄마 옆에 앉아서 멸치 똥을 빼내고 김에 기름을 바르는 걸 구경하던 시간들. 그 시간들 내내 엄마는 한없이 다정하고 사랑을 주는 존재였다. 그 시절 나는 엄마를 너무 사랑했다. 임신을 망설이게 하는 이성적이고 진보적인 이유들을 무력화시킬 만큼 그 당시 감정은 강력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사랑을 주고 싶고, 어린 영혼의 친절한 인생 가이드가 되고 싶었다. 단단한 방어막이 되어서 연약한 존재가 자신이 될 수 있는 가장 큰 존재로 성장하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 내가 그런 기회를 갖지 않아도 남은 인생을 살면서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난 나에게 임신할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리고 많은 생각 끝에 깨달은 것 하나는, 내가 페미니스트로서 임신을 하지 않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은 결국 여성 혐오자들이 저격하는 맘충이 되기 싫은 마음과 닿아 있었다. 무결한 여성. 결국 난 그 여성 혐오자들의 시선을 받아들여 그들이 혐오하지 않는 여성이 되기 위해 내 욕망을 누르고 있는 꼴이었다. 페미니즘은 임신을 희망하는 여성을 비난하지 않는다. 여전히 내 머릿속은 남성 위주의 사고가 남아있었고 페미니스트들에게도 그들에게도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누구에게도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 나는 겁쟁이였다.
앞으로 많은 미움을 사겠지. 실제로 맘충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내 아이들에게서도 미움을 살 것이고 (흑 아직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미움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미움받기 싫어하는 바보 어른이 아가들 덕분에 최소 겁쟁이는 벗어날 것 같다. (진짜 어른이 된다는 말은 못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