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손님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서 난 입구 쪽으로 귀를 쫑긋 세우고 손님이 등장하기를 기다렸다. 그렇지만 손님은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순간 잘 못 들은 것은 아닌지 생각하고 류현진이 등판한 다져스의 경기에 집중했다. 2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손님의 모습이 보였다. 그를 보는 순간 조금 전 인기척이 환청이 아니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아주 느린 걸음으로 들어왔다. 현관문이 열리고 내 시야에 모습이 나타날 때까지 2보 채 안 되는 거리를 그는 약 2시간 동안 들어왔다. 그의 동작이 너무 느려서 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의도라고 보기에는 지극히 안정적인 밸런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움직이고 있다고 예상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나는 그를 계속 지켜봤다.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특이점이 온 동작, 그에 비하면 달팽이의 속도는 F1 레이서의 속도일 것이다. 낡은 구두코가 처음 보였고 그의 온전한 모습이 나타나고 고개를 돌리며 나를 바라보기까지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난 허기를 느껴가면서도 꼼짝하지 못하고 그의 동작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고개를 돌려 나를 힐끗 보고 다시 오랜 시간을 들여 서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구는 어느새 끝났고 류현진은 커리어에 남을 퍼펙트 경기를 했다. 그러나 난 야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오직 움직이는 것이라고 예상되는 그의 동작에 넋을 잃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동작은 그를 구성하는 모든 폴리곤 하나하나가 XYZ 축의 이동을 지시받아 새롭게 지시받은 좌표로 하나씩 하나씩 이동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야구가 끝나는 약 5시간 동안 겨우 4걸음 남짓. 이것이 그의 동작이었다. 날이 기울기 시작했을 때 그는 여전히 서가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더이상 두고 볼 수 없어 그에게 다가가 물어보았다. "도와 드릴까요?" "괜찮다는 말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마감 시간인 11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이 끝나기까지 꼼짝하지 못하고 8시간을 서있을 뿐이었다. 그는 막 책 하나를 향해 손은 뻗고 있었다. 일단 그를 무시하기로 했다. 그리고 마감 준비를 시작했다. 마감이 끝났을 때 그는 겨우 책을 손에 쥐었을 뿐이다. 읽어보고, 책을 구매하고, 다시 문을 향해 나갈때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예상 할 수가 없었다. 이미 시간은 12시를 넘어 막차까지 5분이 남은 상황. 난 내 인내심의 끝을 확인했다. 그를 포기하고 집에 가기로 생각을 정했다. 불은 켜두었고 문은 잠가두었다. 어차피 그가 책을 결정하고 출구를 향해 돌아서는 동안 막차를 잡아타고, 집에 돌아가 샤워를 마치고, 새벽에 일어나 챔피언스리그를 보고, 아침 식사를 하고, 출근해 영업준비를 시작해도 그는 현관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버스에서 난 그의 동작의 흉내 내 보았다. 아주 최대한의 인내심을 가지고 포켓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 보기로 했다. 그러나 곧 실패로 끝나버렸다. 느리게 움직이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아무리 느리게 움직여 봤자 나의 움직임은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난 어리석게도 아들을 생각했다. 어느새 키가 훌쩍 커버린 아들은 지금 내 키 보다 머리하나가 높다. 아들은 예전에도 크고 있었고 지금도 자라고 있다. 그러나 내 아무리 아들의 정수리를 들여다본들 크고 있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리라. 계절의 변화, 지구의 자전, 공전, 우주의 팽창, 별의 소멸과 생성. 결과만 알고 있을 뿐 결코 감지할 수 없는 속도를 오늘 난 목격한 것이다. 그의 출발은 어느 곳이었을까? 언제부터 지구불시착을 향해 걷기 시작했을까? 별을 보며 그의 출발과 탄생을 생각했다. 갑자기 현기증이 밀려왔다. 어느새 버스에서 내려야 할 시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 한 그때 나에게 에너지 한 톨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난, 마치 그 손님과 유사한 어마어마하게 느린 속도로 일어나 출입문을 향해 걸었다. 움직임이 너무도 느려서 정차역을 놓치고 말았다.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천천히 한숨을 몰아쉬며,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마도 그의 느린 동작을 보는 것만으로도 상당의 에너지를 소비했으리라 생각하던 때, 그제야 난 그날의 가장 큰 슬픔을 알았다. 오늘은 책 한 권 팔지 못했단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