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부지런하다
햇빛 바람 비 꽃 풀 하늘에서 땅까지
네가 아닌 게 없다
청명한 하늘을 기대했으나
태풍을 몰고 온 가을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욕심은 그랬다고 가을은 말하고
나는 괜찮다고 했다
폭우를 이겨낸 비행기는 무사했고
나는 안도했다
고요한 눈을 가진 태풍은 쉬이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침수를 이겨낸 자동차는 무사했고
나는 허기가 졌다
보일 듯 말 듯
왕벚나무는 예전에도 지금도 같은 자리에 서서
4월에 오지 않고 이제야 왔냐고 했다
사는 게 바빴다고 나는 말했다
나무는 괜찮다고 한다
오래전
푸른 눈을 가진 이방인이 너를 사랑했다 들었다
그래서 내가 찾아왔다 외롭지 말라 했다
사실은 기다렸다고 나무는 말한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도 나무는 외로웠다
비가 내렸다 폭우였다
랜즈에 습기가 차오르고
카메라는 물이 가득했다
더는 사진을 찍지 못하고
비에 흐느끼는 나무를 오래오래 보았다
나무는 바람에 몸을 떨었다
슬프고 서러운 것
외로운 것은 모두 시간에 있다
태풍이 지나가도 그것들은 남는다
오래도록 붙어 나무와 함께 뿌리가 되고
가지가 되고 잎사귀가 된다
그것들은 곧 꽃이 된다
나무는
태풍을 지나온 나에게 부지런하다 한다
욕심은 그랬다고 나는 말했다
나무는 괜찮다고 한다
태풍이 지나도 나무는 그 자리
계절은 부지런하고
나는 괜찮다
*푸른 눈의 이방인 - 에밀 타케 (제주도 자생 왕벚나무를 최초로 발견하고 전 세계 식물학계에 등재함)
by illru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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