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아닌 별거아닌 하루

래연

by 지구불시착 김택수


별거 아닌 별거인 하루 - 래연


개새끼!


잔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머지 한 손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이를 앙칼지게 물었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그것은 슬픈 일을 의미한다. 또 분노를 의미한다. 내가 왜? 나쁜 건 그 자식인데. 아무 말도 받아치지 않고 소장실을 뛰쳐나왔다. 소장은 고객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 잘못을 모르는 거만한 클라이언트는 이쑤시개를 물고 쩝쩝거렸다. 다리를 꼬고 앉아 의자의 허리가 휠 정도로 상체를 뒤로했다. 벗겨진 구두 한 쪽은 바닥을 뒹굴었고 문을 나서는 내내 시선이 느껴져 불쾌했다. 낮은 목소리로 "조퇴하겠습니다" 한 마디 남기고 사무실을 나왔다. 분노, 슬픔, 고열. 이 순서는 어릴 적부터 한 번도 변함이 없다. 억울한 일이 생길 때면 어김없이 이 과정을 지나오지만… …, 오늘은 그럴 일이 없다. 기분이 너~무 좋다. 회사 밖은 온통 가을이었다. 1분 1초도 가을로 꽉 차있었다. 래연은 어깨를 활짝 펴고 가방을 고쳐맸다. 그리고 의미 있게 한 발을 내딛고 천천히 속력을 붙였다. 그야말로 활기 넘치는 워킹이었다.



출근길 하늘이 너무 예뻤다. 지하철 창가에 선 래연은 서울 한강을 지날 때마다 일탈을 꿈꾼다. 특히 오늘같이 맑은 날이면 사무실은 너무 답답했고, 일상은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오늘은 무슨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조퇴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마침 싸가지 클라이언트가 오전부터 사무실을 찾아오겠다고 선전포고를 해왔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싸가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졸부 컬렉션으로 장식을 하고 온갖 생떼를 만들어 나와 소장을 괴롭힐 것이다. 김태리 뺨을 후려갈길 연기를 보여주마. 래연은 손가락 깍지의 마디를 꺾어가며 의지를 불태웠다. 손가락의 실가락지가 반짝거렸다. 사실 래연의 감정선은 폭이 넓은 편이다. 사람들의 미묘한 표현에 기분 상하는 일이 많다. 그렇지만 싸가지처럼 터무니 없는 생떼에는 의외로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다. 큰 일보다 작은 일에 고민하는 전형적인 타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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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 책방에 들린다. 래연은 독립출판물을 좋아한다. 간혹 눈에 띄는 책을 발견하면 질투와 자극을 동시에 받는다. 나는 왜 하지 못했을까? 에 대한 질투, 나도 진짜 이런 책을 만들 수 있기는 하는 걸까? 하는 자기 의심. 그런 것들이 독립출판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평소 눈여겨 둔 책을 구입한다. 홍콩 여행과 카버 보드 관련 책이다. 이런 책은 동기 부여가 된다. 에너지도 수직 상승한다. 책방을 나와 근처의 럭셔리한 카페를 찾는다. 마침 그런 카페가 보인다. 우아함의 끝을 보여주는 카페다. 주문한 시즈오카 말차가 나왔을 때 래연은 속으로 탄성을 지른다. '고저스!' 아이폰을 꺼내 다양한 각도로 연출한다. 사진을 찍을 때는 아이폰을 감싸고 있는 손목을 살짝 비틀어 찍는다. 세이코 손목시계가 반짝거린다. 셀카도 찍어둔다. 지금을 소중함을 기록한다는 의미에서. 하지만 셀카를 피드에 올리지는 않는다. 너무 드러내는 것은 쉬운 것이고 절제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래연은 누구보다 알고 있다. 아이폰을 내려놓고 시즈오카 말차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는다. 맛은 그냥 그랬다. 구매한 책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천천히 책장을 넘겨 읽었다. 사진의 색감과 책을 만든 취지가 맘에 든다. 다음에 유심히 읽어봐야겠다 생각하며 책 파우치에 담는다. 래연은 혼자 다나는 것을 즐겨 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홍콩 여행은 친구와 같이 간다. 누구와 함께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책임이 따른다. 혼자 하는 것도 함께하는 것도 무리가 없다. 그것은 래연의 최대 장점이다. 래연은 최근 카버 보드를 샀다. 재미가 한참 올라왔다. 이제 막 베이직 턴을 배우고 있다. 중심을 낮게 가져가기가 쉽지 않지만 매력적인 스포츠다. 무엇보다도 힙하다. 카버 보드 검색하고 유튜브 영상을 체크한다. 빨리 능숙해지고 싶다. 보드와 어울릴 만한 모자와 후드티를 사야겠다 생각하며 책을 내려놓고 다시 스마트폰을 든다. 사운드 클라우드에서 괜찮은 밴드를 찾는다. 요즘은 새소년이 좋다. 텀블벅을 찾아보고 SNS를 눈팅한다. 턱을 괴고 엄지손가락만으로 화면을 위아래로 쓸어내린다. 표정은 없었지만 이런 별거 아닌 별거인 하루가 좋다. 해는 기울어 가까운 곳부터 어둑해진다. 먼 하늘은 가까스로 파란 하늘이 남아있다. 붉게 퍼지는 하늘 위로 성급한 달이 올라와 있다. 달과 조금 거리를 두고 너무도 반짝이는 별 하나가 보인다. 별과 마주 보는 래연의 얼굴에도 노을빛이 물든다. 별을 향해 스마트폰을 들고 셔터를 누른다. 래연의 볼에 작은 보조개가 떠오른다. 저 별과 마주한 사람이 또 있을까? 혹시 나에게만 보이는 것이 아닐까? 노트를 꺼내어 작은 별을 그려본다.



일교차가 심하다. 기온이 갑자기 내려갔다. 가방에서 스톨을 꺼내 목에 감는다. 카페를 나온 래연은 조금 걷는다. 해가 저물고 퇴근시간을 넘어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거리에도 지하철역에도. 전철이 들어오고 사람들은 쏟아져 나온다. 그럼에도 전철 안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들과 부딪치며 서있을 자리를 찾는다. 사람들은 무표정하다. 모두가 한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 래연도 아이폰을 들고 스도쿠를 시작한다. 이번 레벨을 클리어하면 트로피를 받는다. 엄청난 축하를 해준다. 커다란 금빛 트로피가 나타나고 화면 가득 색종이가 휘날릴 것이다. 그렇게 래연을 기쁘게 할 것이다. 소장에게 문자가 왔다. 래연의 안부를 묻는다. 몰상식한 클라이언트의 담당 교체를 고민하고 있다고 하신다. 래연은 문자의 안 읽음 표시를 남겨둔다. 조금 뜸을 들인 후. 답장을 보낸다. <클라이언트와의 업무는 계속해보겠습니다. 어떤 상대이든 능숙하게 처리하고 싶습니다. 이 번 계기로 조금 더 성장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걱정 감사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완벽하다. 내일 출근해 서현진 뺨 후려치는 연기를 보여주겠다. 마지막 숫자를 채우고 스도쿠의 모든 방진이 풀린다. "클라이언트 개새끼!" 나지막이 소리 내어 말해본다. 화면에 축하의 트로피와 색종이가 휘날린다. 그것으로 후련해진다.



지하철 역을 나오니 하루가 아직 남아있다. *지구불시착이 보인다. 사장님은 뭐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지구불시착은 손님 없이 사장님 혼자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장님은 언제나 똑같은 얼굴로 웃으며 반겨준다. "래연! 밥은 먹었어? 커피 줄까?" 맨트도 똑같다. 웃음이 나온다. "아니요 차 마실래요. 뭐하고 계셨어요?" "뭐 그냥. 손님이 없네" "그러네요" 래연은 구입한 책을 꺼내어 보여준다. "요즘 특별한 일이 없어요." 책에 시선을 둔 채 싱거운 미소로 "그래도 나쁘지 않잖아" 차를 마시며 "네." 사실이다. 래연은 지금 이대로가 좋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책, 아이폰과 에어팟, 사운드클라우드, 새소년, 여행, 스도쿠의 크라운, 커버 보드, 친구들, 사람들, 인연, 가을과 달, 별, 반짝이는 것들이 좋다. 모든 것들이 지금이라 좋다. "사장님 저 이제 가볼게요. 좀 걸었더니 피곤하네요" "벌써 가게?" 사장님은 입구까지 배웅을 나온다. "래연!" "네?" "스타일리치" "네에? 하하하하하하"

래연은 인사를 하고. 또 의미를 담아 한 발을 내딛고 천천히 속력을 낸다. 어둠 속에서도 하얀 운동화가 반짝거린다.


*지구불시착 - 태릉입구 동네서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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