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번째 만남

은주

by 지구불시착 김택수


백 번 째 만남



"모든 인연은 백 번째 만남을 지나 비로소 이름을 얻는다"

-김택수-



은주, 동주. 두 사람은 약 12개월의 연애를 끝으로 2018년 9월 1일 결혼했다. 1년 전 은주와 동주가 처음 만난 날, 정확히 말하면 백 번째 만나는 날, 지인으로부터 맞선을 봐보라는 전화를 받고 깜짝 놀라는 은주와 동주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오늘!??? 뭔 개소리야 갑자기. 웬 선이야? 예쁘냐? 어 그래? 시간이 없는 건 아닌데… …. 그래도 그렇지 아놔! 옷도 대충 입고 왔는데. 동주는 입고 있는 미키마우스 티셔츠를 길게 늘여 뜨렸다. 이름이 뭔데? 운, 은주? 이름이 은주라고? 정은주? 이름이 정은주야? 정은줄라나? 몇 살인데? 아 그래? 나 바빠 끊어! 어디서? 잠실! 그래? 오늘 야구 있는데, 대충 하고 야구나 봐야겠다. 그래 알았어. 나중에 연락해. 야! 예쁘지?" 전화기를 내려놓고 거울 앞에 선 동주는 미키마우스 특유의 포즈를 취해보고 깐족 거리 듯 머리를 흔들며 시간을 확인한다. 아직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모니터를 다시 켜고 프로야구 하이라이트를 검색한다.



"오늘 선? 아니 갑자기? 피곤한데, 잠실! 집 근처네. 들어가는 길에 잠깐 볼까? 어 차장? 괜찮네. 이름이 뭐야? 이동주? 아 뭐야 이동 주차장이야? 아 웃겨. 알았어 연락할게" 은주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시간을 체크한 후 파우치를 꺼내어 변신할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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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 최근 핫플레이스로 자리 잡은 카페에서 그들의 첫 만남이 실은 백 번째 만남이란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 "미키마우스 티가 귀엽네요." "어려서부터 미키마우스가 왠지 좋았어요." 동주는 갑작스럽게 만나서 복장이 민망하다고 했다. "아니에요. 잘 어울립니다." 은주의 차분함과 동주의 유머가 적절히 어울리는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이쯤 해서 그들의 과거로 돌아가 보자.



은주와 동주의 첫 만남은 백화점 유아용품점에서였다. 생후 14개월 어머니의 아기 띠에 안겨 동주는 미키마우스 인형을 쪽쪽 빨고 있었고, 은주는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은주는 동주를 보자마자 울기 시작했는데, 그 울음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백화점 사람들과 경비원, 책임자까지 무전기를 들고 몰려들었다. 이유는 동주의 거대한 머리 때문이었다. 또래 아이에 비해 유난히 머리가 큰 동주는 머리 크기에 비해 머리숱이 없어서 태어날 때부터 집안 어르신들이 적지 않게 당황하셨다고 했다. 당시 은주 어머니는 어떻게든 달래어 보려 했지만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우는 아이에 겁을 먹고 병원 응급실로 달려가셨다고 했다. 동주는 오히려 사람들이 모여드는 모습에 흥분한 눈으로 미키마우스를 더욱더 힘을 주어 빨고 있었다고 한다.



은주 이모와 동주 어머니는 오랜 지인 관계란 사실이 상견례 이후 밝혀졌다. 따라서 동주와 은주의 만남, 7번, 9번, 17번~22번, 32번은 유아시절 은주, 동주가 그들의 이모와 어머니가 함께 있을 때였다. 동갑내기 두 아이는 티격태격 잘 놀았다고 했다.



그 후에도 은주와 동주의 만남은 계속됐다.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 때 둘은 경주에서 만났다. 황남길 떡볶잇집 앞에서 은주가 남긴 떡볶이를 몰래 집어먹은 아이가 동주였다. 지하철에서 또는 극장앞에서, 버스 터미널에서도 그들은 스쳐지났다. 최종 면접에 늦어 허겁지겁 집을 나서는 동주는 택시를 잡기 위해 전력질주로 뛰어가며 큰 소리로 택시를 외쳤다. 이 택시를 놓치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자괴감이 들것이다. 지각이라니. 동주를 발견한 택시가 멈쳐 기다리는 순간 한 여인이 택시를 가로채 문을 연다. 동주는 10초 거리 앞에서 무너지는 절망의 순간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아 버린다. 기적 같은 52번째 만남의 순간이다. 택시에 올라타려던 여인을 멈춰 세운건 은주였다. 어디선가 나타는 은주는 여인을 붙잡고 오랜 이야기를 나눴다. 동주는 눈치를 살피며 택시를 잡았고 면접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다음날 합격 통지를 받았다.



75번째 만남은 동주는 은주의 생명의 은인이 된다. 그러나 그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강남역에서의 일이었다. 회식을 끝내고 근처의 화장실을 찾던 은주는 화장실 계단 앞에서 동주를 본다. 동주는 계단에서 발을 헛디뎠다. 크게 넘어지면서 얼굴을 기둥에 박고 정신을 잃고 만다. 쌍코피를 흘리며 쓰러진 남자를 본 은주가 119에 전화를 거는 사이 다른 여인이 먼저 화장실을 들어갔는데 그 여인이 강남역 화장실 바바리맨의 피해자가 되어버린다. 동주는 쌍코피로 은주를 바바리맨의 타깃으로부터 구한 것이다. 당연히 은주도 동주도 그 사실을 알 지 못한다.



85번째 만남은 은주도 동주도 선명하게 기억을 갖고 있다. 종로에 탁구장에서였다. 은주는 친구와 함께 태어나서 처음 탁구장에 왔다. 탁구를 치는지 공 줏기를 왔는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이리저리 분주하게 탁구공을 주우러 다녔다. 그때 유난히 신경 쓰이는 옆 테이블의 남자가 동주였다. 깐족거리는 스타일로 온갖 폼은 다 잡고 있었지만 정작 잘 한다는 인상은 없었다. 동주는 스카이 서브를 한다고 엉덩이를 뒤로 빼고 엉거 주춤한 상태로 있었는데 마침 공 주우로 간 은주의 눈에 들어온 것은 궁둥이가 뜯어진 사이로 보이는 미키마우스 펜티였다. 그것도 모르고 오리궁둥이 자세를 유지하는 동주의 폼에 은주는 웃움이 나와 탁구를 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동주도 충분히 은주를 의식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바지가 뜯어진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동주는 여인들의 관심을 끄는 자신의 탁구에 기세등등하여 깐죽거림의 레벨을 최고 등급으로 올리고 있었다. 공을 받을 때도 칠 때도 미키마우스가 인사를 했다. 급기야 둘은 눈이 마주치기도 했는데 서로를 알지 못한 체 동주는 은주에게 미키마우스 펜티로 기억에 남았고, 은주는 동주에게 웃음이 헤픈 이상한 여인으로 기억에 남았지만 그날 이후 탁구장이 거론될 이유는 딱히 없었다.



카페에서 마주한 두 남녀는 사실 당일 아침 99번째 만남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전일 동주는 친구와 야구 직관을 한 후 펍에 들러 맥주를 마셨다. 신천에 사는 친구 집에서 잤지만 불편한 잠자리로 거의 밤을 지새우고 출근을 해야만 했다. 2호선 전철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몸은 아직 컨디션을 찾지 못해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졸립다 싶으면 밀리고 밀리다 싶으면 졸았다. 사람들 사이에 꽉 끼어 옴짝 달 삭을 못하고 있을 때 은주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자리에 겨우 앉아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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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많은 인연이 넘치고 있다. 그러나 서로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건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백 번의 만남을 쌓아가며 인연의 매듭을 짓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너무도 가벼이 여기고 사는 걸지도 모른다. 세상의 인구는 60억이고 당신은 그중 몇 명의 이름을 아는가 생각해보자. 당신이 아는 이름을 소중히 해야 하는 너무도 당연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은주와 동주는 그들도 모르게 백 번째 만남을 가지고서야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되고 호감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의 인연은 이렇게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동줍니다"

"안녕하세요. 정은주에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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