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민

Anassazi의 해민

by 지구불시착 김택수

숲에서 그림자를 보았다.

버려진 섬들마다 꽃이 피었다.



소설의 첫 문장을 읽고 있는 해민에게 어울린 만한 글이 떠오른 것은 이 두 문장이었다. 숲과 꽃. 그것은 해민이 자신을 알리기 위해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장치 일지도 모른다. 해민이 만나는 사람들은 그녀에게 숲과 꽃을 연상한다. 조그만 어깨에서 찰랑거리는 머리 컬이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코스모스 같았다. 말할 때 턱을 흔드는 얼굴은 바람을 맞이하는 민들레가 생각났다. 입가에 살짝 머물다 내려진 커피잔엔 아무런 입술자국도 남지 않았다. 해민은 화장이 화려하지 않아 좋았다. 언제나 조근조근 말하는 그녀는 문자를 대응하는 손가락도 조근조근해 보였다. 해민의 옆자리로 다가가 앉으니 고개를 들며 미소로 반겨준다. 책, 스마트폰, 커피 잔 옆에 스테들러 연필과 함께 조그마한 노트가 보였다. 콜로라도 계곡의 메사베르데 사진이 인쇄되어 있는 노트에는 해민의 필체로 Anassazi라고 쓰여있었다. "아나사지? 아나세이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무심코 노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해민은 놀랜 눈으로 급하게 제제하던 중 커피 잔을 건드렸다. 잔은 중심을 읽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꽝!!!" 엄청난 폭발음과 동시에 일어난 검은 화염은 카페의 집기들을 집어삼켰다. 눈을 떴을 때 사방은 뜨겁게 달궈져 있고 신체의 조각들이 온전하게 붙어 있는지 장담조차 못 할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공포가 고통을 마비시켰다. 검게 그을린 냉장고가 날라와 조그마한 틈이 만들어졌고 그 위로 콘크리트와 철골이 쏟아져 내렸다.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골 중 하나가 하반신 어딘가를 관통하고 있음을 느꼈다. 엄청난 흙먼지와 가스, 화염의 열기가 콘크리트 틈 사이로 들어왔다. '해민은 괜찮은 건가? 어디로 날아가 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떨어지는 커피잔의 잔상이 마지막이었다. 해민을 불러봤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의식이 멀어지던 그때 불빛 하나가 보였다. 해민이었다. 나를 부르는 듯했지만 고막이 손상된 거 같아 들을 수가 없었다. 해민은 작은 틈으로 나를 확인했다. 머리가 다소 헝클어진 것 외에 해민은 놀라울 정도로 변화가 없어 보였다. 해민은 불빛만을 남기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불빛은 스마트폰이었다. 불을 비춰 확인한 내 모습은 참혹했다. 반응이 가능한 기관은 손가락 몇 개와 오른쪽 눈 정도였다. 스마트폰은 아직 쓸만했다. 검색 창을 열어보니 공릉동 주유소 폭발이 매인에 떠있다. 바로 옆 주유소가 원인이었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돌무더기 사이 작은 노트가 보였다. 손에 닿을 것 같았다. 해민의 노트였다. 가까스로 집어 열어보았다. 해민의 그림과 이야기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편지로 보이는 글도 있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당신의 뜻은 하나도 빠짐없이 잘 들었습니다. 먼 길을 달려온 Anassazi의 바람은 온정이 넘치는 아버지의 지혜를 그대로 전달해주었습니다. 동백동산의 초록 잎으로 부터도 전해 들었습니다. 당신의 예언대로 우리 부족은 너무도 할 일이 많습니다. 인류를 위해, 그리고 지구를 위해. Anassazi의 마음을 그들이 알아주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당신은 어린 내게 늘 말씀하셨죠. 이해하는 것도 이해시키는 것도 각자의 몫이다. 이제서야 그 깊은 뜻을 조금이나마 알 것만 같습니다. 제주도의 푸른 파도를 보냅니다.

당신의 딸로 태어나 자랑스럽습니다.

-나바호의 딸 단델리온-





동백동산과 제주바다라는 단어에서 함께 했던 여행이 생각났다. 모두가 바다에 첨벙첨벙 뛰어들 때 너무도 조심히 바다를 대하던 해민. 파도를 품에 안듯 다루는 손짓과 해변에 남긴 조그만 발자국, 동백동산에서 나무를 만지는 손길이 우리와다르다고 해민을 보며 생각했었다. 그 신비로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보기도 했었다. 모여서 글을 쓸 때 해민은 질감이란 표현을 했다. 해민이 느끼는 질감은 어떤 것일까? 아나사지, 예언, 나바로, 딸 단델리온 . 그건 뭐지? . 나의 의식은 여기서 멈췄다. 아마 출혈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고 내 폐부에는 흙먼지와 유독가스가 가득했을 것이다.





<일어나셨나요?>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리가 아닌 것이 뇌를 통해 전달됐다. 해민의 목소리였다. <난 죽었나?> 목소리를 낼 수 없었지만 말이 해민에게 정확하게 도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죽지 않았어요 괜찮아요 조금 있으면 회복할 거예요.> 역시 소리가 아니었다.

<얼마 동안 누워 있던 거지?> <두 달이요> <계속 누워만 있었나> <아직 움직 일 수 없어요 그렇지만 회복하고 있어요 곧 예전처럼 좋아질 겁니다> <신비의 약초 같은 거야? 머리숱도 많아지나?> <하하하 그런 건 아니에요> <해민의 노트를 봤어 바람과 이야기를 해?> <우린 모두 그렇게 살아왔어요 지금은 그럴 수가 없게 된 거죠 인류가 말하는 과학의 발전이라는 건 반대로 스스로의 능력을 퇴화시켰어요 인간은 가시광선을 너무나 편애하지요 보이지 않는 건 믿으려 하지 않아요> <바보가 돼버렸군> <휴대폰 연락처 몇 개를 외우죠?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거예요> 부정할 수 없었다. <17세기 뉴턴은 과학의 황금기를 만들었죠. 물리학에선 '기적의 해'라고 칭송하지만 우리 부족은 인류 퇴화의 시작을 그 때로 기록하죠 무엇이든 이론을 세우고 증명을 해야 하죠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아요 협곡을 휩쓸고 지나는 바람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인류는 이제 우리 부족밖에 남아있지 않아요> <아나사지?> <네 우리 부족이지요> <그들은 어느 나라에서 왔지?> <우리들은 나라가 없어요> <난민?> 해민의 웃음이 느껴진다. <국경이나 언어는 모두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에서 출발하죠 우린 국경을 두지 않아요 자본 논리에 힘을 쏟지 않아요> <너무 맘에 드는군> <그럴 줄 알았어요 사장님을 보며 아주 조금은 아나사지 부족이 생각났어요> <영광이네 경제적으로 꽝이란 얘기 같기도 하고> <하하하> <궁금한 게 있어> <뭐죠?> <해민 가끔 말할 때 턱을 흔들거나 동공을 지우는 건 혹시 어떤 교감이야?> <하하하하하 그건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습관입니다 그렇게 하면 내추럴 파워가 세지는 느낌도 약간 있기는 해요> <내추럴 파워?> <네 그렇게 말해요> <해민 이름이 단델리온이야?> < 네? 아아 하하하 아나사지는 이름이 딱히 필요 없어요 이걸 보셨나 보네요> 해민은 포켓에서 노트를 꺼내어 열어보고 계속,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어요 꼭 쥐고 있었어요 이 노트> <미안 비밀노트를 봐버렸군> <아니요 오히려 감사해야겠죠> <단델리온 예쁜 이름이네> <사실 아나사지 부족들은 그때그때마다 떠오르는 이름으로 불러요 그래서 이름은 별 의미가 없죠 무엇이든 명령하고 정의를 내려야 지식이라 생각하는 그것도 현대인의 악습이죠> <그럼 어떻게 불러?> <어렵지 않아요 그냥 생각하면 돼요> <원거리에서도?> <원거리는 바람을 이용하거나 파도, 빛에게도 부탁해요> <삼성이나 애플이 좋아하지 않겠군>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렇겠네요> <다시 좀 자도 될까? 졸음이 밀려오네> <네 그럼요 좀 쉬세요 너무 무리하면 안 좋아요> <그런데 나는 지금 어디 있는 거지? .> 해민은 나긋한 목소리로 소리를 내어 말한다.


"아주 먼 곳에 ."




숲에서 그림자를 보았다. -백의 그림자-

버려진 섬들마다 꽃이 피었다. -칼의 노래-



-끝-

illru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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