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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Oct 20. 2019

우울증은 질병입니다

by 블루미


우울증은 질병입니다. 이 말은 팩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넌 극단적 이기주의자야”라는 말은 듣지 않았겠지. “우리 딸이 미쳤냐, 정신병원에 가게”, 라는 부모님의 통화 소리도. “너는 도대체 왜 그러니”라는 말 역시. 마음 같아서는 캠페인이라도 하고 다니고 싶은 심정이다. 우울증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에요, 결심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병’인 거예요. 




당연하게도, 당연하게라는 것이 너무 슬프지만, 우울증을 질병으로 인정받은 경험보다는 인정받지 못했던 적이 훨씬 많다. 일단 나 스스로부터가 그랬다. 분명히 아픈 건 맞는데, 정상인 상태가 아닌 건 분명한데, 미칠 것 같고 너무나 절박하고 절실해서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인데, 주변 사람들에게 어디가 아프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중학교 때 우울증이 발병해서 조퇴와 결석을 밥 먹듯이 했던 나는, 자퇴할 때까지 친구들에게 그 이유를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어렵게 들어간 고등학교에서는 또 재발을 하는 바람에 학교를 제대로 나가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담임선생님과 얘기를 하는데, “너는 가족 생각도 안 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자야”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조용히 학교 문을 나서서 근처 아파트 맨 위층에 올라가 한참을 울었다. 하필 그날따라 하늘은 너무 푸르고 구름은 또 너무 예뻐서, 왜 이 아름다운 세상 속에서,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 혼자 이 모양인지 믿지도 않는 신 탓을 한참 하다가 세상이 원망스럽고 그런 말을 한 선생이 원망스럽고 아직도 못 죽은 내가 제일 원망스러워 아픈 마음을 끌어안고 한참을 고통스러워했다. 그 푸른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고, 비가 떨어질 때까지 나는 혼자, 그렇게 울었다. 나를, 내 삶을, 내가 내뱉는 숨결을 저주하면서.




내가 이렇게까지 살아야 할 이유가 있나 한참을 골몰했다. 결론은 No였다. 그저 죽지 못해 숨 쉬는 것일 뿐. 정말 진심으로, 아주 간절하게 죽고 싶었다. 내 생명의 가치는 단 1도, 0.0001퍼센트도 없었다. 외부에서 시작된 원망의 고리는 역시나 마지막으로 내 가슴을 뚫음으로써 완성되었다. 그러면 내 세계는 셔터가 내려가면서 닫히고, 나는 또 끝없는 자책과 우울과 고통과 절망 공허 속 어딘가를 헤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자살 사고로 머리가 뒤덮여 있는 나에게, 그 말이 방아쇠를 당겨준 느낌이었다. 얼마 후, 나는 각종 끈과, 약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 희망의 끈은, 끊어졌어야 할 내 목숨줄 대신으로 끊어졌다. 




또 얼마 후, 나는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내 침상 앞에는 사지를 결박당한 노인분이 계셨는데, 끊임없이 괴성을 지르고 묶인 몸으로 발버둥을 치셨다. 그리고 그 옆에는, 소변줄과 호흡기를 달고 죽은 듯 누워있는 분이 계셨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제발 내 생명을 이분들이 대신 가져가 주셨으면, 내 수명을 나눠드릴 수 있었으면 하고 불가능한 소원을 아주 간절하게 빌었다. 야속한 세상은 이번에도 내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면회 시간 때 부모님 두 분께서 모두 찾아오셨다. 살면서 중환자실에 면회도 다 와본다며 웃으셨지만, 곧 눈시울이 붉어지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니가 두려울 게 뭐가 있냐, 엄마 아빠가 이렇게 다 살아있는데 뭐가 문제냐”라고.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러게, 나는 도대체 뭐가 이토록 문제여서 이렇게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않은 존재가 되었을까. 나도 정말 모르겠어’ 




보통 처음에는 우울증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게 된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탐색한다는 게 외부에서 내부로, 더욱 안쪽으로 파고들어가면서 나중에는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 지금 내 상황을 설명할 만한 충분한 이유로는 부적합하다는 판정이 내려지는 것이다. 그러면 또 남들과의 비교 프로세스가 가동되고, 나는 자책을 하며 잘못된 인과관계를 잇고 있는 것이다. ‘부모님도 두 분 다 살아계시는데-나는 왜 이렇게 힘든 걸까’ ‘남들 다 버티는 거-나 혼자 왜 못 버틸까.’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정된 그 원인은 비수로 변해 내 가슴을 찔러 상처를 낸다. ‘왜 나는 이거 하나 못 버티는 거지’ 하고. 이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암이라든지, 당뇨라든지 다른 질병의 경우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의 내가 저 말을 듣는다면 아마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미안해, 엄마 아빠의 존재함과 나의 우울함은 아무런 상관이 없어.’ 




그저 내가 힘들면, 아프다고 생각이 되면 병원이나 상담소를 찾아 치료를 받으면 되는데, 이게 말은 쉽지만 그 과정이 정말 쉽지가 않다. 일단 내가 힘들다고 인정을 하는 것부터도 너무 힘들다. 안 그래도 내가 제일 힘든데, 그 상황에서 스스로를 더 채찍질하고 억누르게 된다. 억눌러서 일상생활이 유지가 될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그 직전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오가다 보면 결국은 밑바탕부터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 그 상황이 되면 정말 블록 쌓기처럼 나의 기저부터 한 칸씩 한 칸씩 다시 새롭게 쌓아 올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지경까지 오기 전에 스스로의 마음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먼저 병원을 찾는 것이 오히려 지름길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정신과는 보이지 않는 문턱이 높은 것을 알지만, 처음 발 디디는 것이 두려워서 그렇지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생각보다 별게 아님을 알게 된다. 빼곡하게 들어찬 진료 대기 명단과 생각보다 평범해 보이는 환자들에 한 번 놀라면서.




처음에는 정신병원 말만 들어도 펄쩍 뛰던 우리 부모님께서 누구보다도 든든한 내 지원군이 된 것처럼. 고민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병원을 한 번 가보라고 먼저 권유하시는 것처럼. 부모님이 내가 약을 먹었는지 입안을 검사할 때, 약을 혀 밑에 숨겼다가 뱉어내던 내가 이제는 혼자서 병원을 다니며 약을 타고 매일 챙겨 먹게 된 것처럼. “아프면 병원을 간다"라는 말이 내 마음에 있어서도 비로소 자연스러워지게 된 것이다. 




건강은 건강할 때 챙겨야 한다. 이 말은 마음의 건강에도 분명 적용이 된다. 나는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다. 나는 혼자서 앓다가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나의 기반부터, 흩어진 조각들부터 그러모아서 완전 새로이 쌓아 올려야 하는 상황까지 떨어졌기 때문이다. 상담을 할지 말지 고민한다는 것은, 그래도 너무 늦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회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미 본인 스스로 나아지고자 하는 동기가 있다는 것을 뜻하므로. 그럴 땐 그냥 가면 된다. 


나는 아주 많은 상담소의 문턱을 밟았다. 하지만 제대로 종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왜냐면 내 자의로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이미 처음 정신과를 찾았을 때, 스스로를 해할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폐쇄병동 입원을 권유받았다. 그때는 제대로 대화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으므로, 상담이 효과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일단은 주는 약이라도 먹었는데, 약물치료는 그래도 반응을 보여서 점점 상태가 완화되었다. 




우울증은 감기라는 말에 반은 동의하고, 반은 동의하지 않는다. 우울증에 걸리게 되는 것은 감기와도 같을 수 있다. 왜냐면 감기도 내가 걸리고 싶어서 걸린 게 아니고, 내가 낫고 싶다 생각한다고 뾰로롱 나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병의 심각성 측면에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감기와 우울증의 위험성을 따진다면, 당연히 후자가 훨씬 더 위험하다. 감기 때문에 죽는 사람은 없지만, 우울증으로 죽는 사람은 굉장히 많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내가 아플 때, 내 친구가 권해 준 노래를 하나 소개하고 싶다. 넬의 ‘백야’라는 노래인데, 추천받은 지는 사실 꽤 됐음에도 불구하고 첫 소절이 잊히지 않는 노래다. “난 네가 필요해.” 나의 존재가치를 스스로도 부정하는 상황에서, 큰 위로가 되었다.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는 가사이지만, 그때 나에게는 마치 내가 사라지고 난 이후의 상황을 그리며 남겨지는 사람들이 나를 이 세상에 붙잡고자 속삭이는 듯한 노래로 들렸다. 우울할 땐 더 우울한 노래를 찾아 듣는 나여서 우울 플레이리스트는 굉장히 많지만, 아픈 사람들에게는 그 노래들보다는 이 노래를 추천하고 싶다. 이런 노래가 아니더라도, 나의 존재가치를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소중히 여겨 마음 건강도 잘 보살피게 되는 그날까지,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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