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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Aug 25. 2020

반장님이라면

 어떤 물건은 용도와 쓰임, 또는 외모로만 평가된다.  또 어떤 물건은 특정한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대게 후자의 경우에 애착이라는 게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물건은 인간관계의 연장선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의 분신이 되기도 한다.

 

 어느 날 반장님이 (난 그분을 반장님이라고 부른다) 라면 포트를 가져왔다. 그분은 젊었을 땐 책을 좋아하셨지만, 지금은 책이 멀어질 만큼 멀어졌다고 하신다. 그런 분이 책방에 들리는 이유는 나 때문이다. 나는 항상 그분에게 걱정을 팔고 있다. 아이들의 대소사를 다 챙겨주신다. 첫째가 고등학교 들어갈 때 봉투를 보내셨다. 아이들 생일 때는 카카오 선물로 케이크나 아이스크림을 보내주셨다.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도 봉투를 주셨다. 오삼불고기 먹으라며 냄비 채 들고 오시고, 고구마, 과일도 봉지를 나눔하고 가신다. 그런 그분이 아들 결혼식에는 청첩장도 안 주신다.


 그분은 나를 김 대리라고 부르신다. 내가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은 10여 년이 훌쩍 넘었다. 첫째를 포대기에 앉고 다닐 때였다. 회사를 차리고 분주했고 어리버리했다. 의류사업을 시작했는데, 일본에서 샘플 의뢰지시가 오면 공장에서 샘플을 만들어 일본으로 보내고 일본에서 그 샘플로 오더를 내리면 난 다시 공장에서 옷을 생산하고 검품해 일본으로 보내는 일이었다. 엄청 많은 양의 샘플을 만들어야 했는데 대부분의 샘플을 반장님이 제작해 주셨다. 샘플은 상당히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다. 지시하는 파트와 작업하는 파트 사이에서 트러블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제작에 관한 지혜는 대부분 반장님의 숙련된 솜씨에 의지했다. 반면 샘플의 납기는 엄격한 편이라 난 주로 반장님의 시간을 뺏는 자였다. 난 과격한 표현이나 공격적인 말을 못 하니까 주로 부탁을 했다. 사정을 해야만 했고 불쌍하게 보이는 게 특기였다. 반장님은 이런 나에게 언제나 어이구~ 야 김 대리! 이걸 어떡해! 못 해! 하시며 모든 구절마다 느낌표가 붙는 듯한 목소리로 윽박을 지르지만 웬만한 거는 다 들어주셨다. 불쌍하게 보이기 전략이 잘 먹혔던 것이다.

 

 그때도 그랬지만 책방을 시작하고 지금까지도 이것저것 잘 챙겨주신다. 하지만 말투는 그대로다. 아직도 김 대리라고 하신다. 여전히 혀를 차면서 구박을 주신다. 어느 날은 라면 포트를 사 오셨다. 라면은 맛있다. 특히 책방에서 먹는 라면은 유별나게 맛있다.  나는 책방에서 라면을 종종 끓여 먹는다. 반장님이 사다 준 라면 포트를 사용한다. 스테인리스의 밑바닥이 타버려서 면발이 달라붙는 귀찮음이 따름에도 개의치 않는다. 라면은 역시 반장님이 사주신 포트에 끓여 먹어야 제맛이다.


스테인리스의 밑바닥이 몽땅 타버려서 더는 라면 포트의 역할 수행이 불가능해지더라도 반장님의 라면 포트를 쉽게 버릴 수 있을까? 아마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땐 반장님에게 새것으로 다시 사달라고 해야겠다. 아마도 애 봐!! 뭐라는 거야!! 야!! 김 대리!! 하면서 모든 구절마다 느낌표를 하나씩 더해 어이없는 웃음을 보이며 새것으로 사다 주실 것 같다.








illru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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