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구불시착 김택수 Aug 27. 2020

티브이와 리모컨



 가전제품이 풍족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는 옆집과 함께 같은 기종의 티브이를 산 적이 있다. 리모트 컨트롤이 딸린 신기종이었다. 지금은 방구석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리모컨이지만 당시 리모트 컨트롤은 총천연색 티브이보다 획기적인 물건이었다. 리모컨을 들고 벽면과의 반사각을 실험하기도 했고 감지기 앞에 종이를 세워 몇 장까지 작동되는가를 테스트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나는 기발한 생각이 스쳤다. 스쳤을 것이다. 옆집 티브이를 몰래 원격조정해보기로 했다. 지금은 스마트폰 중독으로 모두가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이지만 그때만 해도 온 가족이 티브이앞에 오손도손 모여있을 때였다. 채널이 휙휙 바뀌니 옆집 가족이 모두 리모컨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 시선이 몰리고 곧 고성이 오갔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장난을 멈춰 옆집 평화유지를 위해 결정적 역할을 했었다.


 한번은 이삿짐을 트럭에 싣고 조수석에 앉아 주머니에 넣어둔 리모컨을 발견하고 또 장난이 발동해 아무나 걸리라고 하는 식으로 버튼을 눌렀었다. 그때 운전석에 있던 친구가 얼마나 박장대소를 했던지 오사카에서의 잔잔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예전에 어느 다큐멘터리는 평범한 일가 5곳을 밀착 취재하는 기획이었다. 흰 런링구 바람에 반바지를 입고 소파 아래서 무릎을 세워 꼬고 누워 한쪽 팔로 머리를 괴고 다른 한쪽 팔은 리모컨을 들고 있었는데 이 모습이 일상의 아빠들과 너무도 닮아 실소를 한 적이 있었다. 아이들이 자라 밖으로 나가고 엄마는 집에서 뒹구는 남편의 모습이 보기 싫었을 것이다. 티브이가 꺼지면 어쩐지 허전함이 몰려왔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티브이와 견고한 우정을 쌓아가고 있는 아빠들이 처량해 보였다. 그들에게 리모컨마저 없었다면, 백이면 백 돌아누워 허리를 말고 잠을 청할 것이다. 리모컨의 첨단 기술은 그렇게 아빠의 위치를 보장해주는 것이 아닐까.


 거실에는 대여섯 개의 리모컨이 돌아다닌다. 좀 정리가 되는 집이라면 리모컨 바구니가 있어 한군데 모아두기도 한다. 티브이 리모컨은 특히 집안의 실세가 주도하는데 나는 실세가 돼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김택수

instagram  @illruwa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