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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Jan 23. 2022

오늘의 등장인물 - 낭비의 신

by 김택돌

오늘의 등장인물 - 낭비의 신


오늘도 걸어서 출근했다. 삼 일째 걷는다. 집에서 책방까지의 거리는 대략 6km, 걷는 시간으로는 대략 1시간이 걸린다. 걷는다는 건 쉬워 보이는 행위 같지만, 시간이 거듭되면 될수록 얼마나 고된 노동인가를 알게 된다. 걸어서 10분이 지나면 열이 차오른다. 두터운 방한복이 불편하다. 40분이 지나면 마스크 사이로 나온 입김으로 눈썹 위에 하얀 물방울이 매친다. 숨을 좀 크게 몰아 쉬면 눈썹에 매친 방울들이 흩날려 눈앞에 이슬비가 내리는 현상이 생긴다. 50분이 지나면 발목 통증이 엉덩이를 타고 올라와 허리를 괴롭히는데 고통을 참기가 쉽지 않다. 과기대를 지나며 글사랑 출력센터에서 포스터 한 장을 출력했다. 오전에는 사람들이 붐비지 않아 좋다. 출력물도 어제와 다르게 깨끗하게 나왔다. 글사랑 사람들은 이름만큼 친절하다. 난 언제나 이곳을 갔다가 나올 때면 기분이 좋다. 그림의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이 곳 사람들의 친절함이 이유일 때가 많다. 포스터를 들고나오는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오늘 큰 눈이 내린다고 했다. 


9시 40분 책방에 도착했다. 제법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요즘은 간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화초의 상태를 살피는 일을 첫 번째로 하고 있다. 아주 건강한 상태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힘을 내고 있다. 10시가 되자 예성이가 왔다. 눌러쓴 모자 위로 눈발이 가득 내려 앉아있었다. 나는 얼른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몇 장 찍으려다 말고 랜즈에 캡을 닫았다. 4년째 눈이 올 때마다 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사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요즘 나란히 앉아 각자의 할 일을 한다. 그렇게 12시까지 있기도 하고, 길게는 3시까지 있기도 하다. 너무 아무것도 안 한다 싶으면 가끔 일어나 서가를 정리하기도 하고, 노래 선곡을 바꾸기도 한다. 그래도 손님이 없으면 현관을 바라보기 시작하는데 가끔은 한숨도 동반한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이건 한숨이 아니야라고 하는데, 한숨이 아니라 뭐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도 없다.


눈이 한바탕 쌓였다. 가게 앞 경사가 약간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나는 운동을 좀 하겠어 하고 일어나 눈을 쓸고 들어왔다. 30분 정도 지났지만 여전히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다. 창밖을 보고 있자니 많은 걸 내려놓게 되었다. 반면 다양한 낭비를 할 예정이다. 전력 낭비와 유튜브낭비를 하고 시간 낭비와 걸음 낭비를 해야겠다. 돌아보니 나는 그간을 살아오면서 낭비와 소비에 인색했음을 알았다. 주머니에 오천 원 한 장과 천원 세장이 있었다. 과자를 사러 가야겠다. 


양파깡과 감자깡, 카라멜 땅콩을 사고 돌아오니 남녀 한 쌍이 책을 고르고 있었다. 오늘의 유일한 매출이 될 줄 알았는데 천천히 책을 고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갔다. 과자나 먹어야겠다. 커다란 과자 통에 세 봉을 몽땅 털어놓았다.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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