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바람
사장님 내일 시간 못 내죠?
지인에게서 문자가 왔다. 나는 사장이다. 사장은 시간이 자유롭고 돈이 많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나는 그렇지 않은 쪽의 책방 사장이다. 문자를 보내온 건 수잔이다. 수잔은 5년 전이었던가? 그보다 더 됐으려나? 책방 사장과 손님으로 만났다. 키가 크고, 손가락이 길다. 옷을 편하게 입는다. 말을 천천히 하고 웃을 때 다소 맹추같이 웃는데 나는 그 웃음이 수잔의 많은 장점 중에서 서너 번째로 좋다. 또 그녀는 그림을 그린다. 온기가 남은 찐빵과 반짝이는 것, 아슬아슬 작은 것, 어디에도 있는 돌, 반려견 복순을 그린다. 수잔은 책방 지인들에게 인기가 많다. 아마도 수잔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잘못된 사람일 확률이 높다. 설령 수잔이 잘 못해도 난 수잔 편을 들 준비가 되어있다.
갑작스럽게 온 문자에 나는 시간 낼 계획을 세워봤다. 그러나 확답을 줄 수가 없다. 근무 시간을 무시할 수 있는 형편도 못 되는 사장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데? 하고 물었더니 가까운 산에 노을 보러 가자고 한다. 요즘 노을은 한순간도 놓치면 아쉬울 정도로 예쁘다. 이게 노을이구나 하면서 고층 빌딩 사이로 붉은 구름 조각 하나라도 붙잡고 싶을 정도다. 노을이 지는 시간은 아주 빠르다. 혀끝에 단맛이 최고조일 때처럼 빠르게 사라지는 게, 내가 조금 잘 살던 시절 같았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수잔과 만난 시간은 9시가 거의 다 돼서였다. 봉화산 진입로는 루트가 많아서 길 찾기가 쉽지 않은데 수잔이 가게 가까이 와줬다. 나란히 걸으면서 수잔은 걷기와 운동에 관해서 이야기 했다. 이동을 목표로 하면 그냥 걷는 것이고, 운동이 되는 걷기는 힘 있게 걸어야 한다고 했다. 간단히 말하면 운동은 운동처럼 걸어야 한다는 말이다. 산은 어느새 다가와 입구를 열고 우리를 마중했다. 수잔과 나는 빨려 들어가듯 걸었다. 그것이 운동이었는지 땀이 나고, 숨이 거칠어지다가도 시원한 바람이 불면 단번에 회복됐다. 유월 아홉 시면 어둠 속에도 빛의 잔여가 남아있다. 사실 그 빛은 마음속에서 발하는 빛일지도 모른다. 밤이라면 밤이고 밝다면 밝은 것이다. 우리는 잠시 포장하지 않은 길로 걸었다. 그 길은 가로등도 없고 자연 그대로의 시야로 걸어야 했다. 짙은 바다색 하늘 아래 숲의 나무들은 그림자가 서로 얽혀있었다. 컴컴한 밤의 컬러는 차갑고 투명한 숲길로 만들어져 있다. 숲은 어둠을 계산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잔은 계산했다. 크로스 백에서 헤드랜턴을 꺼내어 불을 밝혔다. 빛이 있으니 한결 걷기에 편해졌다. 수잔은 계속 길 안내를 하며 걸었다. 700m만 오르면 정상이라며 표지판을 가리켰다. 700m는 순간이었다. 잘생긴 데크와 시원한 바람이 힘을 보탰다. 정상에 도착해 정자에 잠시 앉았다가 걷기 운동 전후에 좋다는 체조를 했다. 수잔이 따라 할 수 있도록 천천히 구령을 붙여줬다. 동작이 어려우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는 말도 해줬다. 이런 다정함이 수잔의 첫 번째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어깨너비로 발을 벌리고 발꿈치를 여덟 번, 천천히 올렸다 내렸다 하기가 종아리에 기분 좋은 열을 가했다.
전망이 좋은 데크에 몰려있던 사람이 빠져나갔다. 그 자리로 이동한 우린 서울 야경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저기가 우리 집이야, 저기가 남산, 롯데타워도 보이네, 저기는 성곽길인가? 하면서 야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답답했던 종합소득세 신고 이야기와 가족들의 이야기를 편하게 하며 산에서 내려왔다. 야트막한 봉화산을 오르는 동안 나는 제주 서귀포의 작은 오름 생각을 했었다. 시원한 바람 끝에 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비행기를 가까이서 볼 수 있던 오름이었다. 제주도만큼 좋았던가? 버스에 올라탄 나는 맨 뒤쪽 자리에 앉아 얼얼해진 종아리를 느끼면서 발꿈치 올리기를 반복해 본다. 버스 창문 너머로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던 밤이었다.
by 택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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