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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Feb 27. 2019

길을 좀 걸었습니다



  종묘 옆 서순라길을 좀 걸었습니다. 오랜만에 해가 떠 있는 시간 외출을 하였습니다. 겨우 모든 게 좋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나의 표현의 한계가 아쉽습니다. 나는 이런 순간을 아주 사랑합니다. 해가 길어졌음을 느끼는 이 순간은 매년 이맘때 한 번쯤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업무를 마치고 답답한 사무실에서 나와 름이 어렴풋이 남아있는 하늘을 볼 수 있던 것만으로도 황홀감에 빠지곤 했었습니다. 아주 적당한 바람이 폐를 파고듭니다. 이 바람은 어디서부터 달아왔는지 아마도 봄의 내음이 희미하게 묻어있음을 가슴은 알고 있습니다. 오늘 유난히 끈기 있게 내려앉는 노을 속에서 근사한 봄을 마주하는 희망을 아주 잠깐 생각해봤습니다. 종묘를 끼고 도는 골목에는 작은 공방과 분위기 있는 카페들이 많습니다. 가게마다 개성 있게 발산하는 노란 조명은 창에 어려 이기긴 힘든 유혹을 합니다. 그 유혹을 뿌리치고 나는 좀 더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손님을 기다리는 가게 앞 플라스틱 의자도, 전신주에 기대어있는 리어커도, 오래된 돌담 사이에 막 고개를 내민 여린 초록도 각자의 할 일을 아는 모양입니다. 그냥 이 시간에 존재하기만 하면 그만일 것입니다. 그들은 이 골목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듯 자연스럽습니다.





  골목을 나와 택시를 탔습니다. 도시와 고궁 사이로 달리는 택시에서도 연신 셔터를 누르며 감탄했습니다. 노을을 품은 도시를 그림으로 채우기에는 내가 가진 색이 너무 모자라 다 글릴 수가 없을 정도로 예쁩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것들,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가족, 그림, 노래, 영화, 책 이런 것들만 생각하며 긴긴 겨울잠에서 이제 막 내려온 행운 한 움큼을 주머니 깊숙이 밀어두었습니다.


마치 어두운 감옥에서 특별외출을 받아 나온 사람처럼 도시 구경에 넋을 놓았지만 불안하지는 않았습니다.





illruwa

instagram @illruw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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