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 카카오 조용한 음악 틀어줘~
어른들은 움츠려 작아지고, 아이들은 거리에서 다시 사라졌습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인지 뜨거운 국물을 찾는 손님들이 많아졌어요. 주방이 한차례 난리를 치르고 난 후, 북적대며 식사를 하시는 손님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봄은 온다’라고 말씀하셨던 관리소장님 생각이 문득문득 납니다. 계신 하늘에선 계속 봄일까? 당신 가족들 말고 가끔 나도 내려다보실까? 그렇다면 ‘거봐…’하시며 흐뭇해하시겠지? 계절은 때가 되면 오는 건데 뭐가 그리 조급했던 걸까요. 소장님은 또 왜 그리 서둘러 가신 걸까요. 이 식당이 문을 닫을까 걱정하셨던 할아버지께서 오랫동안 발걸음을 안 하시네요. 진심으로 걱정됩니다.
처음 이 상가에 식당을 열었을 때는 마치 군데군데 빠진 이처럼 창고로 사용되는 곳이 많아서 밤에는 어둡고 스산한 기운마저 들었는데 지금은 그곳마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작은 가게들이 생겨나 새 이웃이 되었습니다. 다들 화분을 내놓고 꽃을 가꾸시니까. 계절에 따라 꽃들이 만발하고 싱그러운 화초들로 훤해지고, 환해졌어요. 거리라고 하기엔 몇 걸음 안되지만 그리고 카페만 있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당당하게 ‘카페거리’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마카롱 자매들은 여전히 빵을 열심히 굽고, 방울토마토는 이제 열리지 않으니까. 요즘 저는 깨진 꼬끄를 얻어먹어요.
종달새처럼 재잘대던 소녀들이 대학생이 되어서 찾아왔습니다. 제법 성숙한 아가씨 티가 납니다. 저는 처음부터 알아봤는데 녀석들은 이곳을 처음 온 것처럼 시치미를 떼어요. 학창 시절 이곳에서 얼마나 깽판을 쳤는지 죄다 기억하고 있는데 말이죠. 하지만 고객의 비밀은 내 그림자를 영원히 깔고 눕는 날까지 지키는 것. 처음 오는 손님 대하듯 '주문은 키오스크에서 해주세요'라고 정중하게 안내해요. 둘은 추억을 소환하여 이 식당의 바뀐 것과 그대로인 것을 찾아내 소곤소곤거리며 키득키득합니다. 저 더러는 변했다고 할까요? 그대로라고 할까요? 아마도 여전히 관심이 없겠죠. 음식이 테이블로 나가자 마치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라도 만난 듯 즐거워합니다.
재우 씨는 유학에는 실패를 했고, 편입에는 성공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열애 중이에요. 그 소녀들 중에서 항상 라멘을 먹으며 소설을 읽었던 여대생을 제가 소개해 줬거든요. 고백을 세 번째 만남에서 해야 되는지 아니면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하는지 저와 단골들은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라면을 끓여 먹여가며 어렵게 키운 딸을 주정뱅이에게 시집보낸 기분이랄까. 아직은 조마조마합니다. 데이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새벽 알바도 하고, 대학원을 가기 위해서 공부도 열심히 한답니다. 오늘도 율이는 여전히 뉴스를 나르고, 마카롱자매들은 꼬끄와 빵을 구워요.
나도 한번 남들처럼 로망을 실현시켜 보겠다고 시작한 일을 아직까지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 꿈의 핵심이 ‘내가 만든 요리를 누군가에게 대접하고 싶다’는 아니었어요. 식당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의 이야기에 반해, 저도 그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었죠. 그래서 식당을 차렸고 시간이 지나니 다행히도 자연스럽게 손맛도 생긴 것 같아요. 물론, 추억할만한 일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굳이 안 좋은 기억을 글로 저장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뭐 대단한 글을 쓴다고 몇 날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혼자 킥킥대가며 밥도 거르고, 때론 줄담배를 피워가며 밤을 새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글은 손님들과 나눈 7년간의 대화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짧은 에피소드에서는 꺼내지 못한 최목사님, 착한 민구, 엉뚱한 민재, 우산 청년, 케잌 사장님, 수린이와 채린이 자매도 떠오릅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들의 이야기도 하고 싶어요.
관계가 지속된다는 것은 서로 혼잣말을 하게 놔두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통은 꼭 언어가 아니어도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저는 이제 입을 닦은 휴지를 주머니에 숨기고 나가시는 모습에서도 깊은 배려를 볼 수 있고, 식사가 끝난 테이블에 가지런히 포개어진 빈 그릇에서도 고마움을 느끼는 또 다른 초능력이 생긴 것 같아요.
저물녘. 힘든 하루를 보낸 당신의 퇴근. 마침 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가운데쯤. 다른 길로 돌아갈 수도 없는 외길. 그 골목에 접어들면 여기서 새어 나가는 주황 불빛은 어둠 속에서 당신의 이정표가 됩니다. 저의 가장 큰 장점은 항상 여기에 있다는 것. 그러니까 미리 연락하지 않아도 돼요. 이상하게도 당신이 오는 날에는 다른 손님들은 없는 식당. 터벅터벅 익숙한 소리. 지친 당신의 발걸음. 저는 튀김기의 온도를 올려요.
“헤이 카카오 조용한 음악 틀어줘~”
스르르 문이 열리고 역시 당신의 자리는 비워져 있어요. 인사나 주문 같은 것은 촌스러운 것. 우린 그 정도는 텔레파시로 교신하니까. 씩~웃어 보이는 걸로 충분합니다. 여기는 덥거나 추워요 그러니 아직은 미리 코트를 벗지 마세요. 따뜻한 둥굴레차를 한잔 따라드릴게요. 가라아게가 튀겨지는 소리, 도마 위에서 레몬이 잘려 나가는 소리, 얼음을 깨는 소리를 좋아하는 당신. 나를 재촉하지 않고 다찌 너머에서 팔을 괴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 조금만 기다려요.
오늘 회사에서 속상한 일이 있었나요? 그렇다면 제가 복수해 줄게요! 레몬을 가르던 칼에 눈길을 보냅니다. 그 정도는 아닌가요? 그냥 욕만 해줄까요? 당신은 그만 쉬세요. 이제 분노는 나의 것.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자비 따윈 없는 무자비한 빌런. 혼이 쏙~빠지는 허세 가득한 수다로 당신을 웃게 만들어요. 당신은 웃을 때 눈이 반짝거린다는 말을 또 해줍니다. 오늘도 제법 잘 버티신 것 같아요. 그리고 견디어 내길 잘했죠? 서로의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몇 가지 고민 정도는 알고 있는 우리는 묘한 유대감의 친구.
‘하이가라!’ 드디어 하이볼과 방금 튀겨낸 가라아게가 당신의 다찌 위에 놓입니다. 당신은 서두르지는 않고 눈을 감고는 길게 한 모금을 마셔요. 그리고 활짝 웃는 얼굴로 나를 보며 하는 한마디.
‘퇴근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