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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하고 아름다운 Aug 05. 2019

시작한 것을 끝내자

하나라도 완성하기

스케치가 일단 나오는 데까지의 시간은 각자 다르다. 스케치를 하다 만 것과 스케치가 완성이 된 드로잉이 다름을 그린 사람도 알고 보는 사람도 알아본다.


 그림 한 장, 아니 하나의 대상을 그리다 보면 금세 피곤해진다. 짧은 시간이라도 그리는 대상, 결정하는 머릿속, 관찰하는 눈, 대상과 내 종이 사이를 번갈아 보며 옮겨가는 손과 판단하는 머리 이 모든 활동을 동시다발적으로 하고 있으니 엄청난 집중을 하고 있는 것이다.


피곤함과 당 떨어지는 현상보다  더 어려운 건, 힘겹게 하나를 그리는 동안 계속해서 그려나갈 힘,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택할게 많다니 선을 왼쪽으로 찍 그을지, 찍찍 그을지 두껍게 채울지 비워둘지 모든 게 내 선택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 그리고 결과가 즉각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괴롭다. 이 선택의 책임은 전부 나에게 있다는 사실도 괴롭다. 남 탓이라는 것이라도 하면 내 속이라도 편하겠지만 그럴 수도 없다.


내가 봐왔던 수많은 그림들과 나 사이의 간극은 엄청나게 벌어져 있고, 내 그림은 초라하고 매력 없고 다른 이들의 그림은 화려한 것 같다. 분명 꽉 찬 풍성한 꽃을 그리려 했는데 쭈글쭈글한 마른 어묵처럼 보일 때 이걸 계속 그려야 하나 아니면 다 지우고 다시 할까 고민하게 된다.


스케치북을 한번 덮으면 다시는 펼치지 않거나, 다시 그 그림을 수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잠깐 쉬다 그릴 수 있는 에너지가 있을 때  다음 장을 넘겨 다시 시작해보는 것도 좋다. 왜 쭈글 해 보이지? 음영을 주려던 게 주름처럼 보이기 때문일까? 맘에 안 드는 부분을 발견하면 그 부분만이라도 다시 바꿔보자. 맘에 안 들면 안 되는 부분을 끝까지 시도해도 되지만 그 부분을 지우거나 다른 것으로 채워 넣을 수도 있는 것이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그러고 나서 완성된 그림을 봤을 때는 묘한 애정과 만족감이 생겨난다.


그려놓은 스케치를 그냥 러프 스케치로 두기,


다듬어 완성된 드로잉으로 두기,


채색까지 해보기, 다른 색 더 마음에 드는 색으로


다시 채색해 보기


이것들은 다 다른 창작의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거친다고 절대적으로 그림이 좋아진다는 보장은 없다. 창작에는 공식이 적용되기는 어렵다. 모든 과정을 통해 그림은 생각하지 못한 더 나은 방향으로 다듬어져 처음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형태를 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다 해봤는데 처음의 그것이 제일 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을 수도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할 때 자주 쓰는 말 ‘그냥’이라는 말처럼 그냥 너무 기대하지도 실망하지도 말고 그냥 그려보자.


작은 드로잉이라도 하나를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제 완성되는지, 되었는지는 그린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완성된 그림을 마주할 때 방금 전까지 괴로워하며 왜 이렇게 마음에 안 드나 고민했던 시간은 싹 잊히고, 내가 꺼낸 내 일부 같은 만족감에 도취되기도 한다. 그게 단 몇 초일 지라도 말이다. 고유하고 유일한 무형의 것을 유형으로 내가 창조하다니 창작만이 가지고 있는 성취감 같은 것이다. 그걸 경험하는 순간 나는 할 수 있는 경험을 가지게 되고 그 경험은 가끔씩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 애정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바쁘다 나는 게으르고 느려서 바쁘고 각자 자기 삶에 놓인 일들을 처리하고 다니느라 바쁘다.


시작만 하고 끝내지 못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집에 두고 나온 설거지만 생각해도 나의 게으름, 회피하는 성격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릇과 수저 각종 집기가 많지 않은 나는 며칠째 이어진 설거지 못함으로 오늘은 저녁때 집에 들어가도 먹을 그릇도 컵도 없게 되었다. 직면해야 하는 날이 온 것이다. 아무도 궁금하지 않은 변명을 하자면 엊그제는 밤늦게까지 수업을 하고 집에 오니 12시였고 그다음 날엔 계속 밖에서 먹고 들어왔고 그다음 날엔 여수에서 수업을 하고 서울에 왔을 때 이미 새벽이었다. 그래서 그다음 날은 완전히 곯아떨어져 저녁부터 잠들어 버렸다. 설거지를 안 해서 그릇이 없다고 변명해봤자 누군가 이걸 본다면

‘더럽다, 깨끗한 척 다하더니 어머머 웬일이니?’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다행이도 아무도 볼 일이 없다.

어쩜 그리 시간이 나지 않아 미루고 미루던  그 어려운 설거지를 어쩔 수 없이 오늘은 할 것이다 해야만 한다, 뭐라도 마시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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