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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추가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
세 마리일 수도 있다
by
Illy
Jun 1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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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요리한 불고기를 상추에 얹다가 문뜩 나는 언제부터 쌈 싸 먹는 걸 좋아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는 가끔씩 고깃집에 가면 하는 한정적인 식사법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상추가 유료라 눈치를 보면서 먹었던 기억이 있다.)
밥이랑 낫토를 김에 싸서 먹을 때는 있었지만 낫토가 손에 묻는 게 싫어서 젓가락으로 작게 작게 말던 기억이 있어 적어도 나에게는 "쌈"을 먹는 감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살기 시작하고 거의 매일 요리를 하게 되니
자주 밥과 반찬을 채소에 싸 먹게 되었다.
그것만으로 20프로 정도는 더 건강하게 먹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좋고 어중간하게 남은 상추나 양배추를 쌈채소로 다 썼을 때의 만족감도 크다.
그리고 가끔씩 어릴 때의 나에게도 쌈채소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먹는 속도가 많이 느린 편이었다.
왼손잡이를 교정하고
있었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이것저것 딴생각을 하느라 느려졌을 수도 있다.
지금은 없겠지만(없기를 바라지만) 옛날 일본 초등학교에는 점심시간 내에 못 먹으면 수업이나 청소 시간이 시작되어도 교실 구석이나 복도에서 끝까지 먹게 하는 끔찍한 체벌(?)이 있었다.
내 담임선생님만 그런가 싶었는데 어른이 돼서 만난 또래 친구들 중에도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이 있었고 "居残り給食(발음: 이노코리
큐쇼쿠, 뜻: 그 자리에 남아서 급식 먹기)"라는 단어로 검색하면 꽤 사례가 나온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급식이 아니라 도시락을 싸 갔었는데 나도 1~2학년 때에는 몇 번 차가운 복도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그렇게 혼자 복도에서 먹는 건 은근히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도시락을 싸
준 엄마가 슬퍼할까 봐 속상하기도 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최대한 빨리 먹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고안한 방법이 반찬을 하나씩 먹어 치우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게 크게 차이가 날까 싶지만 시금치를 먹고 당근을 먹고 밥을 먹다가 다시 시금치를 먹고... 를 되풀이하는 것보다는 시금치를 끝까지 다 먹고 당근을 다 먹은 다음에 밥을 다 먹는 편이 빠르게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방법을 집에서도 써봤더니 엄마는 좋아하지 않았다.
당연히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가 간이 되어 있는 반찬만 먹다가 맨밥을 입에 쑤셔 넣는 것보다는 함께 먹어주길 바랄 것이다(그리고 밥-반찬-국 순으로 돌아가면서 먹는 일식의 매너(三角食べ: 세모 먹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내 안에는 빨리 먹기와 예절을 지켜가며 먹기 사이의 갈등이 생겼고 집에서는 되도록이면 후자 방식으로 먹도록 노력했다.
그런 배경이 있어 볶음밥이나 파스타 등 원플레이트 식의 음식이 나오면 정말 반가웠는데 한국에 와서 쌈밥을 먹어보니 이들과 비슷한 속도로 먹을 수 있어
마음에
들었다.
손바닥 위에서 각각 반찬들을 원플레이트로 만들어버리는 느낌이다.
그렇게 나는 쌈이 속도와 예절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걸 한국에 와서 깨닫게 되었고 그때부터 적극적으로 쌈을 먹는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빨리 먹어야 하는 장면이
많지 않지만...)
참, 영양까지 세 마리 토끼일 수도 있겠다.
이렇게 다시 옛날에 느꼈던 서러움이나 갈등이 하나 풀렸다.
어떻게 보면 정말 사소한 일일 수 있지만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지는 방법은 어디에 떨어져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삶이 신기하고 흥미로운 것 같다.
주말 메뉴는 늘 고민거리지만
냉장고에 상추가 있어 든든하다.
가족과 함께 오늘도 건강하게 식사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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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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