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복잡해지는 걷기

by 민현

내가 언제부터 걷기 시작했을까. 기억을 더듬어 오르다 보면 초등학교 2학년 때에서 멈춘다. 당시 초등학교는 집에서 버스로 네 정거장 떨어져 있었다. 아홉 살이 걷기에는 거리가 꽤 있었다.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설 때 엄마는 늘 왕복 버스비 120원을 쥐어 주셨다. 가끔 버스를 타는 대신 120원을 손에 쥐고 걸었다. 학교 가는 길을 걸으면 60원이 생겼고, 집에 오는 길까지 걸으면 120원이 내 것이 되었다.


사실, 걸으면 돈이 된다는 걸 깨달은 건 나중 일이다. 처음 걷기 시작했던 건, 120원을 남기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머릿속이 복잡할 때 걸으면 좋았다. 걷는 건 늘 혼자여야 했다. 그래야 방해 없이 고민을 머릿속에서 주무를 수 있으니까. 그때의 고민이 뭐였는지는 기억에 없다. 아마도 그 나이에 어울리는 고민이었을 것이다. 좋아하는 짝꿍, 하기 싫은 숙제, 갖고 싶은 장난감 같은. 그러다 나중에 120원으로 뭐할까 하는 고민도 추가되지 않았을까.


초등학교 이후 한동안 뜸하던 걷기가 다시 시작된 건, 대학생이 되고부터이다.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살고 있다고 느껴지면 수업을 제치고 길을 찾았다. 술만 취하면 집까지 걸었고, 안 취했다면 생각에라도 취하려 걸었다. 그 시절 버스 요금이 600원이었던가. 다행히 당시 걸었던 이유가 600원으로 뭐할까 하는 고민 때문은 아닌 듯하다. 걷는 목적이 초등학교 때와는 조금 달랐다. 복잡해서 걷는 게 아니라 복잡해지려 걸었다. 걷다 보면 뭐라도 떠오르니까.




아내는 아침 달리기를 할 때 뜻밖의 생각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술을 줄이기 위한 맥주 과금제도 달리면서 떠올렸다. (집 냉장고의 맥주는 1,000원을 내야 먹을 수 있다.) 나 역시 달리기를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긴 하는데, 그다지 번뜩이는 것들은 아니다. 힘들다. 아직 반도 안 뛰었네. 오늘은 쉴걸. 그만 뛸까. 하는 생각들을 머리에 얹고 5km를 뛴다.


부당한 맥주 과금제.

자유로운 생각은 걸을 때 온다. 글쓰기의 소재이거나, 써 보려는 소설의 플롯, 맥주 과금제의 부당함에 맞서 아내에게 대항할 논리가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릿속에 들어찬다. 물론 생각의 대부분은 오늘 저녁은 뭐 먹지, 앞에 가는 아저씨 발목양말에 샌들을 신었네,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등의 쓸데없는 생각들이긴 하다.


쓸모없는 생각이더라도 반갑게 반긴다. 내 머릿속이 보물상자는 아니어서, 꺼내는 모든 것들이 반짝이지는 않는다. 쓸만한 생각들은 수많은 쓸모없는 생각들 사이에 숨어있다. 강변의 굴곡, 퇴적물 속에서 사금을 채취하듯 머릿속의 쓸모없는 생각들을 하나하나 걷어 내다보면 반짝이는 조각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조그만 조각들이 모여 한 편의 글이 되기도 하고, 매너리즘에 빠진 일상을 깨우기도 한다.

걷다가 고양이를 만나기도, 개구리를 만나기도.


유랑선생 작가님이 댓글로 알려주신 옆 동네 룸피니 공원으로 나선다. 30분가량 서쪽을 향해 걸으면 룸피니 공원이 나온다. 집을 나서면서 우기의 방콕 하늘을 확인한다. 북쪽 하늘이 비를 품은 구름으로 어둡다. 바람도 체크한다. 바람의 방향이 북서쪽이다. 북서쪽의 바람은 어두운 구름을 멀리 밀어내고 있다. 그렇다면 비 걱정은 없다.


저녁의 룸피니 공원은 평화롭다. 키 큰 나무 사이로 달리는 사람과 걷는 사람이 섞여있다. 고양이가 길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의 달리기를 방해한다. 내 걷기도 고양이 앞에서 멈춘다. 쓰다듬고 싶다는 욕망이 들지만 슬쩍 보이는 발톱이 날카롭다. 고양이를 뒤로하고 다시 걷는데 바람 방향이 바뀐다. 바뀐 바람을 타고 검은 구름이 빠르게 내 쪽으로 다가온다. 남쪽의 하늘도 덩달아 어두워진다. 큰일이다. 머릿속이 온통 비 걱정으로 채워진다. 비가 올까. 안 오겠지. 올 거 같은데. 설마.


공원의 평화는 깨진다. 굵은 빗방울이 쏟아진다. 매대의 천막 아래로, 화장실 입구로, 등나무 아래의 벤치로, 각자가 안전하다 여기는 곳으로 피신한다. 빗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달리는 사람들도 보인다. 차도남인 난 비에 아랑곳한다. 잎이 무성한 커다란 나무 아래로 숨는다.


언제 그칠까. 바람의 방향은 남쪽, 검은 구름이 머리 위에서 빠르게 지나고 있다. 구름이 지나는 자리를 다시 메울 구름은 북쪽 하늘에 충분하다. 적어도 30분 이상은 꼼짝없이 나무 아래에 갇혀 있을 듯하다. 머릿속은 온통 비다. 구름과 바람이다. 오늘의 사금 채취는 성과가 없다. 상관없다. 뭐, 이런 날도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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