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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Mar 08. 2023

그래? 그러지 뭐.

   은퇴 후 3년이 순식간에 지나고 결국 그날이 왔다. 통장 잔고가 서너 달의 생활비만큼만 남아 앞으로 살아갈 돈을 마련해야 하는 날. 다시 몇 년을 버틸 수 있도록 통장 잔고를 채워야 하는 날. 가진 건 집 한 채뿐이고, 돈 나올 구석은 그 집 밖에 없어서 6년간 살았던 집을 내놓아야 하는 날. 그러니까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나와야 하는 날.


   더는 벌이가 없다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 생활비는 배고픈 아이처럼 매달 통장에 두둑해 보였던 얼마간의 목돈을 야금야금 깎아 먹었고, 어느새 통장이 바닥을 드러 낸 지금 걸신들린 생활비는 6년 간 살아 온 집을 넘 봤다. 돈 나올 구석이 그 집 밖에 없다는 걸 녀석도 잘 알고 있었다. 집을 내놓자마자 판교에 직장을 가진 맞벌이 신혼부부가 집을 채갔다. 우리가 막 결혼을 하고 얻었던 집은 다시 이제 막 결혼을 한 새로운 신혼부부의 차지가 되었다. 집을 내어주고 받은 보증금으로 생활비의 배를 채웠다.


   온 가족이 함께 하기로 한 장모님의 칠순 여행은 유럽으로 정해졌다. 온 가족의 유럽 여행을 위해 몇 년 전부터 매달 얼마간 적금을 넣었다. 적금이 만료가 되어갈 즈음 코로나가 퍼졌다. 여행은 미뤄졌다. 코로나의 기세가 3년 만에 꺾이고, 나라 간 이동이 쉬워지면서 미뤄두었던 여행의 계획을 다시 세웠다. 여행 일정이 마침 집 없는 시기와 겹쳤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여행 기간만큼 집이 비워진 채로 방치되는 게 내심 아까웠는데(빈 집이더라도 관리비를 꼬박꼬박 내야 했다.) 집이 없으니 홀가분했다.


   집 없는 김에 아내와 장기 여행 계획을 세웠다. 유럽으로 향할 비행기 값은 미리 마련한 적금으로 해결이 되었고, 유럽에서 머무를 숙소 비용은 한국에서 집을 새로 구하면 나갔을 월세로 상쇄가 되었다. 여행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비행기 값과 숙소 비용이 만만해지니 유럽에서 오래 머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2023년 1월 1일부터 크로아티아가 쉥겐지역에 포함된다는 뉴스가 나왔다. 90일간 무비자로 여행이 가능한 쉥겐 국가 일정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로 채웠고, 90일 이후의 일정을 비 쉥겐 국가인 크로아티아로 잡았었다. 크로아티아가 쉥겐 가입국이 되면서 90일이 넘는 일정이 모두 쉥겐 국가들로만 채워지게 되었다. 일정을 바꾸지 않으면 유럽에서 불법체류자가 될 판이었다. 크로아티아를 버려야 했다. 아쉽긴 하지만 그래야지 뭐.


   다른 비 쉥겐 국가(이를테면,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등)를 크로아티아 대신 끼워 넣으면 불법 체류 문제는 해결된다지만 미리 예약한 크로아티아 숙소가 문제였다. 저렴한 대신 환불이 불가한 숙소였다. 니나(에어비앤비 집주인이다.)가 우리의 상황을 이해해 줄까. 일단 우쭈쭈 시전.

   ‘니나, 너희 나라 유럽연합에 포함되었다며. 진짜 축하해.’

   크로아티아의 월드컵 4강 진출에 감동했으며 우리가 루카 모드리치의 열렬한 팬이라는 이야기도 쓸까 했는데 너무 속 보이는 듯해서 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하지만 우리에게는 슬픈 소식이란다. 크로아티아 일정을 취소해야 할 것 같아. 아니면 우리 불법 체류자 되거든.’

   우쭈쭈가 통한 걸까. 니나는 쿨했다.

   ‘우리나라가 유럽연합에 속하게 되어서 미안해. 너희의 곤란함도 충분히 이해해. 에어비앤비 규정에 따라 환불해 줄게. 아마 환불수수료를 내야 할 텐데, 그건 나도 어쩔 수 없어.’

   한 달 치의 숙소비용을 모두 환불해 주겠다는데 그깟 환불수수료 따위.


   에어비앤비로 니나의 숙소를 예약할 때, 그녀의 숙소 정보에는 에어비앤비가 보증해 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흔치 않은 기회입니다. 니나님의 에어비앤비 숙소는 보통 예약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인기가 많은 숙소이니 우리가 아니어도 니나의 숙소는 바로 다른 여행자가 예약을 하겠지. 진심으로 그러길 바란다.



   

   크로아티아의 일정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그 유명한 사라예보가 수도인 나라이다.)와 세르비아로 변경했다. 새로 예약한 숙소는 크로아티아보다 훨씬 저렴했다. 물가도 싸면서 모든 음식이 맛있단다. 왜 처음부터 이 루트로 여행계획을 세우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변경한 계획이 만족스러웠다.


   모든 여행은 미리 계획하고 준비한 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어제는 오늘이 쌓이면서 새롭게 변경되고, 어제의 정보를 바탕으로 준비한 계획은 오늘이 되면서 조금씩 틀어진다. 여행뿐만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도 미리 마련한 대비를 비웃으며 비껴간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불안해하진 않는다. 새옹의 말이 무슨 짓을 할지는 어차피 나는 모르고 모르는 것이 정상인 게 삶이니까. 계획이 틀어지고 무너져 다시 손봐야 할 때면 일단 한 마디 던져 놓고 소매를 걷어올린다. 그래? 그러지 뭐.




이번 매거진은 idle​ 님과 함께 꾸려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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