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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Mar 16. 2023

매일 가벼워지고 있다.

   여행의 일정은 3월 초부터 6월 말까지. 겨울의 끝자락에 한국을 떠나 여름이 시작될 무렵 돌아온다. 여행 일정이 계절에 걸쳐 있다는 건 챙겨야 할 옷가지가 늘어난다는 의미이다. 가벼운 봄 옷들로만 짐을 꾸리면 좋겠는데, 봄 옷만으로는 아직 추운 3월을 버티기 힘들다. 빠르게 더워지는 6월이 되면 잔바람에도 하늘거릴 얇은 옷이 아쉽다. 봄 옷 사이에 조금 두툼하고 무거운 점퍼와(3월이 지나 날씨가 풀리면 버리고 싶어질 만큼 자리를 차지한다.) 시원한 반팔의 얇은 여름옷(6월까지는 캐리어에 처박혀 있을 예정이다.)을 끼워 넣는다. 일주일치의 속옷과 양말까지 더해지면, 캐리어의 공간은 1/3 정도만 남는다.


   캐리어의 남은 공간에는 로망을 담는다. 이삼십 대 젊었을 때의 캐리어에는 담지 않았던 것들이다. 사십 대가 되면서 챙기기 시작한 것들. 그러니까 아침 달리기를 위한 트레이닝복과 러닝화, 물감이나 스케치북 같은 그림도구, 몇 권의 책, 블루투스 스피커 같은 것들. 캐리어에 로망(사실상 헛된 욕심)까지 욱여넣으면 이제 캐리어는 지퍼를 닫기 힘들 만큼 불룩해진다. 아직 챙겨야 할 목록이 남아있다. 짊어지고 다닐 배낭을 하나 더 준비해 그곳에 세면도구와 핸드폰과 아이패드를 위한 충전기, 슬리퍼, 모자, 상비약 등을 넣는다. 아, 탁상달력과 펜, 메모지, 그리고 메모지를 냉장고에 붙여 놓을 자석도 잊으면 안 되지. 캐리어와 배낭을 체중계에 올려보니 18kg, 나와 함께 다닐 4개월어치의 무게이다.


   18kg의 무게는 고달프다. 장거리를 이동할 때엔 비행기가 실어주고 버스가 날라주긴 하지만, 걸어야 하는 모든 길에서는 18kg의 무게를 몸에 둘러야 한다. 캐리어의 바퀴가 어느 정도 무게를 덜어주긴 하지만 수시로 길바닥에 박혀있는 돌들과(왜 유럽애들은 길바닥에 돌을 박아 놓는 건지. 이쁘긴 하다만.)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 없는 계단이(몇 백 년 된 건물들이 즐비한 곳이니 이해는 한다.) 캐리어의 바퀴를 방해한다.


   18kg의 무게는 돈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용하는 대부분의 값싼 비행기는 수하물을 공짜로 실어주지 않는다. 무게 구간에 따라 매겨진 비용을 따로 지불하고 나서야 탑승권을 얻을 수 있다. 장거리 버스도 마찬가지이다. 버스 요금과 별도로 수하물의 개수만큼의 비용이 추가된다.(어쩌면 비행기에서처럼 우리가 값이 가장 싼 버스를 골라서였는지도 모른다. 물론 비행기보다는 무게 인심이 후하다.)


   인천에서 아부다비를 지나 로마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6시였다. 크로아티아 스플리트행 비행기가 뜨는 저녁 6시까지 12시간이 비었다. 빈 시간 동안 짧게나마 로마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18kg의 무게를 12시간 내내 이고 지고 다닐 수는 없어서 로마 공항의 짐 보관소를 찾았다. 공항 지하층 구석 끄트머리에 있는 짐 보관소에서 금발 아주머니가 친절하게 우리를 맞이했다. 하지만 짐 보관 비용은 금발 아주머니의 목소리처럼 친절하지는 않았다. 고작 몇 시간 보관해 주는데 짐 하나당 10유로라니. 아내와 나 각각의 캐리어와 배낭, 모두 4개의 짐을 맡기고 40유로를 내야 했다. 몇 시간, 몸에서 18kg의 무게를 덜어 내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이었다.




   25평 아파트에서 11평 오피스텔로, 그러니까 사는 곳의 공간을 좁히는 걸로 앞으로 몇 년간의 생활비를 충당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 25평의 공간을 채우던 살림살이를 11평의 공간에 맞도록 줄이고 버려야 했다. 소파를 버리고, 옷장을 버리고, 서랍장을 버리고, 눈에 띄는 더는 설레지 않는 것들을 버리고. 25평의 공간은 넓었다. 그 안을 차지하고 있던 살림살이들을 75L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쓰레기봉투는 금세 가득 찼다. 하나로는 부족해 서 너 개를 더 사야 했다. 버리고 버리는데도 일상은 버리기 전의 날들에 비해 불편하지 않았다. 버린 무게만큼 집이 가벼워졌고, 가벼운 공간에 맞게 일상의 군더더기가 떨어져 나갔다. 처음부터 나의 삶에 필요하지 않던 무게였다.


   스플리트의 올드타운에 위치한 우리의 첫 번째 숙소에 도착한 건 밤 9시가 넘어서였다. 41시간 만에 도착한 이곳에 18kg 무게의 짐을 풀었다. 아직은 버리지 못한 무게, 그래서 이고 다녀야 할 4개월어치의 무게이다. 그렇더라도 이번 여행의 무게는 이전보다 가벼워졌다. 다음엔 이보다 더 덜어낼 수 있겠지.(로망 몇 개만 버리면 가능하다.) 짊어지고 있던 무게를 조금씩 덜어내려 한다. 일상에서든, 여행지에서든. 그렇게 우리는 매일 가벼워지고 있다.




이번 매거진은 idle​​ 님과 함께 꾸려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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