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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Sep 30. 2024

사소한 고비 (5 / 5)

   상혁 씨, 청구서는 잘 보셨죠?

   세 번째 전화에서 김종호는 불필요한 인사를 생략했다. 에버나인에서 김종호의 업무 평가는 꽤 상위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명은 간결하고 요구는 명료했다. 김종호가 납품업체 직원이었다면 내가 부장 앞에 끌려가 고개를 숙이기 전에 미리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고 부장을 안주 삼아 씹으며 친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네, 뭐 그런데, 제가 잘못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오해야 제가 직접 풀면 된다는 생각이 드네요.

   금액이라도 조금 깎아 보려는 심산이었다.

   입금을 거부하셔도 저희는 어쩔 수 없죠. 저희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영상을 연락처 목록에 뿌리는 것 밖에 없어요. 처리하기 조금 귀찮은 일을 던질 뿐인 거죠. 말씀하신 것처럼 직접 오해를 푸셔도 됩니다. 그리고 아마도 풀리겠죠. 별일 아니니까요. 그건 상혁 씨 선택입니다. 다만 이 영상이 직장 동료들이나 결혼할 분에게 꺼림칙한 기억으로 남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어요.

   맞는 말이다. 오해이고 억울한 일이었다는 건 머릿속으로 이해하겠지만, 빨간 비키니 여자의 잔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나를 볼 때마다 빨간 비키니 여자가 함께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입금하더라도 거기서 끝나지 않고 추가로 계속 돈을 요구한다던데요.

   이게 뭐라고요. 상혁 씨 말처럼 상혁 씨가 잘못한 것도 없잖아요. 그리고 저희 양아치 아니에요.

   아니 양아치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말을 하고 바로 후회를 했다. 죄송이라니. 나를 얼마나 멍청한 놈이라고 생각할까. 그런데 영상으로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는 양아치 맞잖아.

   이체는 본인 명의 계좌로 하셔야 혼동이 없어요. 납부기한은 이번 주말까지예요. 다음 주부터는 하루에 13,000원씩 연체료가 붙어요. 주말까지 잘 생각해 보세요.


   믹스커피를 탄 종이컵을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입금을 거부하면 영상이 뿌려진다. 경찰에 신고를 한다면? 결혼을 앞두고 경찰서에 들락날락해야 할지도 모른다. 핸드폰을 켜고 연락처 목록을 열었다. 손가락으로 천천히 목록을 밀어 올렸다. 목록의 이름이 영상을 받게 되면 어떨까. 친구들이야 상관없다. 가족들에게도 미리 말해 놓으면 되고. 회사 동료들은 뭐 보든가 말든가. 납품업체? 내 이름이나 기억하려나. 손가락으로 밀려나던 이름이 한 사람을 만나면서 멈췄다. 장모님. 처음 인사드리러 갔을 때 내 손을 꼭 잡아 주셨던 분. 영상을 보고 난 후에도 내 손을 잡아 주실까. 장모님 뒤에서 뒷짐을 진 채로 마뜩지 않은 눈빛을 보내던 장인. 내가 불만인지 자기가 불만인지 식사 내내 말 한마디 없던 처남. 그리고 이들 한가운데의 은영. 빨간 비키니 여자가 이들에게 향한다 생각하니 아찔했다.


   결혼하자던 가을에 별일이 있었다면 우리는 헤어졌을까. 은영과 헤어졌다면 굳이 자원해 출장을 갈 일도 없었을 텐데. 그랬다면 이런 영상 찍힐 일도 없었을 텐데. 양아치를 양아치라 불러서 죄송하다는 바보 같은 말 따위 하지 않았을 텐데. 이 모든 게 은영과 헤어지지 않아서 생긴 일처럼 느껴졌다.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은영의 이름이 떴다.

   예식장에 전화해 봤어?

   헤어졌다면 혼자 있고 싶은 이 시간을 방해받지 않았을 텐데.

   아직 전화 안 한 거야?

   헤어졌다면 예식장 직원에게 식대를 깎아 달라는 비굴한 말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가을에 별일이 있었다면. 그래서 은영과 헤어졌다면.

   안 했으면 그냥 둬. 이곳저곳 물어보니 다른 예식장들도 다 그렇다네. 식대는 하객 수 보장해야 할인해 준대.

   그럼 어떡해? 다른 데 알아봐?

   일부러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

   아니, 그냥 거기서 해. 주말에 예식장 한 번 더 둘러보고 식대 할인은 어차피 안 되니 12시 타임으로 계약하자.

   뜻밖의 말에 놀라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은영의 목소리가 불빛처럼 환했다.

   주말에 별일 없지? 같이 가서 계약 해.

   환한 목소리가 흘러 들어와 어두웠던 머릿속을 밝혔다. 뒤틀려 꼬인 마음을 풀었다. 은영을 겨누던 공연한 원망이 무색해졌다.

   응. 주말에 별일 없어. 주말에 가자.

   주말에는 은영과 예식장을 한 번 더 둘러봐야 한다. 편한 마음으로 청첩장을 돌려도 괜찮을 12시 타임으로 계약을 해야 한다. 빨간 비키니를 주말까지 끌고 갈 수는 없다. 주말에는 별일이 없어야 한다. 은행 앱을 열었다. 청구서에 적힌 계좌번호로 청구된 금액을 이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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