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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Sep 27. 2024

사소한 고비 (4 / 5)

   상혁 씨 3박 4일 동안 너무 아무 일이 없어서요. 어쩔 수 없이 저희 직원을 보냈어요.

   그 여자가 직원이었다니. 어이가 없었다. 나는 발끈해서 대꾸했다.

   이봐요. 이거 사기잖아요. 숙박 앱에 그쪽 정보 다 떠요.

   그러니까요. 제 핸드폰 숙박 앱에서도 정보가 다 보이네요. 저희도 하루 머물다 간 투숙객이거든요.

   김종호가 천연덕스럽게 말해서 오히려 머쓱했다.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물었다.

   청구서를 보내 드릴게요. 받아 보시고 이의가 없다면 계좌로 청구된 금액을 입금하시면 됩니다.

   전화를 끊자 청구서가 문자로 도착했다. 청구 내역은 항목별로 구분이 되어 있었다. 숙박비, 카메라와 라우터 설치 비용, 인건비, 여직원 인건비 등의 항목 옆에 각각 금액이 매겨져 있었다. 입막음비 항목 옆에는 십만 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영상을 배포하지 않는 대가인 듯했다. 실소가 터졌다. 결국 십만 원어치의 허물이었다. 내 잘못이 십만 원이면 지워진다는 것에 문득 안도감이 들었다. 아래쪽에는 계좌번호와 목록의 합계 금액이 있었다. 금액은 걱정했던 것보다 적었다. 납득이 될 만큼 합리적인 액수였다. 그 옆으로 서비스차지 10%와 vat 10%는 별도라고 적혀 있었다. 무슨 서비스를 받았다고 서비스차지가 붙어. vat는 또 뭐야. 에버나인이 실제로 존재하는 회사이고 어쩌면 김종호라는 이름 역시 실명일 것만 같았다. 현금영수증을 요구하면 친절하게 발급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은영을 집에 보내고 돌아서도 머릿속 은영은 가지 않고 남았다. 머릿속에 남아서 둘의 미래를 가늠했다. 우리는 결국 결혼할까. 혹은, 언젠가는 헤어지려나. 어느 쪽이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만난 지 8년이 되었으니 결혼을 해도 이대로 헤어져도 어느 쪽이든 이상할 것이 없었다. 어떤 날은 내가 먼저 묻기도 했다. 상상속 은영의 반응도 나와 비슷했다. 결혼할까? 하면 은영은 그래, 했고 헤어지자, 해도 알았어, 했다. 나도 은영도 왜? 라고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가 없었다. 8년의 시간에는 결혼할 이유와 헤어질 이유가 모두 충분히 있었으니까.


   넉 달 전, 일주일간 쌓인 집안일을 마친 일요일 오후에 은영을 집 근처에서 만났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야구모자를 눌러쓴 차림이었다. 늘 그랬듯 동네 허름한 분식집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어서 분식집 안은 한산했다. 구석 테이블에 은영은 창 밖을 보며 앉았고, 나는 맞은편, 주방이 보이는 쪽에 앉았다. 메뉴판을 슬쩍 한번 보기는 했지만 늘 시키던 참치 김밥 한 줄과 돈가스를 주문했다. 계산대 가까운 테이블에 놓인 TV에서 저녁 뉴스가 나왔다. 볼륨이 작아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김밥이 먼저 나오자 은영은 김밥 끄트머리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TV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김밥을 절반쯤 먹었을 때 돈가스가 나왔다. 은영이 먹기 좋은 크기로 돈가스를 잘랐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만나 동네 분식집이나 간다는 건 헤어질 이유가 될까. 참치 김밥과 돈가스를 반씩 나누어 먹을 수 있다는 건 결혼할 이유가 될까. 마주 앉아 있는데 더는 가슴이 뛰지 않는다는 건 헤어질 이유가 될까. 가슴 뛸 일 없이 안온하게 마주할 수 있다는 건 결혼할 이유가 될까. 은영이 한 조각 남은 김밥을 내 쪽으로 밀었다.


   분식점을 나와서 길 건너 공원을 걸었다. 길을 따라 벚나무가 줄 맞춰 서 있었다. 성격 급한 벚나무 몇 그루가 이미 벚꽃을 터뜨렸다. 해가 지면서 쌀쌀한 기운이 밀려왔다. 은영이 내 점퍼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가을에 별일 없지? 우리 가을에 결혼할까?

   별일 아닌 것처럼, 주말에 약속 있어? 벚꽃이나 보러 갈까? 하는 톤으로 물었다.

   서른을 넘기고 싶지는 않아서.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하니 결혼이라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아니어서인지 은영은 잠깐 멈칫한 내 반응에도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그래. 그러자.

   나 역시 별일 아닌 것처럼 대답했다. 가을에 정말 별다른 일은 없었으니까. 은영은 고개만 한번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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