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현 Oct 02. 2024

신분 (1 / 6)

   첫인상은 그저 그랬어. 옆으로 지나가도 고개 돌려 다시 보지는 않을 정도랄까. 친구 녀석이 턱으로 가리키며 저기 보이지? 저기 왼쪽에서 두 번째, 바로 쟤야, 라고 어차피 그쪽까지는 들리지도 않을 텐데 한껏 목소리를 낮춰 말했어. 왼쪽에서 두 번째? 검은 츄리닝 바지 입고 있는 애? 하고 물었더니 더 작은 목소리로 응, 쟤 귀엽지 않냐? 하는 거야. 큰 키는 아니고 머리는 어깨 닿을락 말락. 검은 뿔테 안경에 검은색 츄리닝 바지. 피부 좀 하얀 거 말고는 평범한 여자애였어. 야, 네가 아까운데? 했더니 그치? 저 정도면 내가 들이대도 안 까이겠지? 하면서 우쭐하더라고.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왼쪽에서 두 번째보다는 세 번째가 더 낫지 않겠냐? 하는 뜻이었는데. 자기가 좋다는데 내가 뭐라 할 수는 없고 그 여자애를 한 번 더 유심히 바라봤지. 그 애 행동 하나가 인상에 남았어. 주머니에서 꺼낸 고무줄로 머리를 묶는데 뒤가 아니라 위로 올려 묶더라고. 그런 머리를 뭐라고 하나? 분수대 물줄기처럼 위에서 갈라지는 머리 있잖아. 특징을 찾으니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멀리서 지나가기만 해도 분수대 물줄기 머리가 보이더라. 비슷한 키의 4인조. 늘 그들과 함께 다니고 넷 중에서 리액션이 가장 크고 그래서인지 언제나 넷 중에서 가장 즐거워 보이는. 그게 연수의 첫 느낌이었어.


   1학년 가을에 4인조 중 한 명이 내가 다니던 독서실을 등록했어. 같은 학교 교복이어서 마주칠 때마다 눈인사 정도는 했었지. 하루는 공부도 안 되고 해서 휴게실로 나와 빌려 온 만화책을 보고 있는데 걔가 와서는 대뜸 야, 너 이름 은호지? 그러는 거야. 당황해서 어, 어, 했더니 난 박채란이야, 그럼 또 보자, 하더라. 그 뒤로 독서실에서 마주칠 때마다 채란이가 먼저 말을 걸고 그렇게 몇 마디 나누면서 친해졌어. 주말이었나? 휴게실에 있는데 채란이가 와서는 오늘 공부 진짜 안 된다, 하길래 그럴 땐 만화책이지, 하며 몇 권 주니까 그거 이미 본 거라면서 그냥 얘기나 좀 하재. 어쩌다 연수 이야기가 나와서 내 친구 중에 연수 좋아하는 애가 있다고 했거든. 곧 연수에게 고백할 거라고. 그랬더니 채란이가 진지한 표정을 짓고 단호하게 말하더라. 너 걔한테 당장 연수 포기하라고 해. 연수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어. 그것도 엄청. 다음날 그 이야기를 친구에게 해 주면서 너 쪽팔려 죽을 걸 살린 거다, 했더니 그 녀석은 아, 그러냐? 하고는 비슷한 모습의 다른 여자애를 찾아내 금세 빠져들더라.


   겨울 방학이 되면서 연수도 내가 있는 독서실로 옮겼어. 헐렁한 검은색 츄리닝 바지에 분수대 물줄기 머리를 한 채로 말이야. 집이 멀어서 버스를 타야 한다길래 그럴 거면 굳이 왜 여기까지 왔나 했는데 그냥 채란이 때문인가 보다 했지. 한 독서실에 다니다 보니 서로 볼 기회가 많아졌어. 휴게실에서 함께 컵라면도 먹고 서로 만화책도 빌려주면서 말이지. 셋이 모이면 대게 채란이와 나만 이야기했는데 그렇다고 연수가 겉돈다는 느낌이 든 건 아니었어. 말 대신 행동으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대화를 했거든.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중하고 웃기지 않은 말에도 연신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이야. 그러니까 그 웃음이 문제였지. 연수는 웃을 때 눈을 반달로 만들고 하얀 이를 보이면서 깔깔댔는데 언제부터인지 그 모습이 그렇게 예뻐 보이더라. 말장난만 치면 반사적으로 연수에게 시선이 갔어. 연수가 웃으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막 뛰고. 내가 왜 이러지. 그냥 평범한 애일 뿐인데. 고백하더라도 까일 것 같지 않은, 함께 다니면 내가 아까울 것만 같은 애인데. 연수에게 끌리는 시선을 애써 붙잡았어. 그렇게 연수에게 조금씩 빠져들었나봐.


   연수가 처음 내 이름을 불렀을 때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 별 말도 아니었거든. 저녁을 먹고 독서실에 들어오는데 입구에서 연수와 마주친 거야. 보자마자 가슴이 콩닥거렸고 눈동자는 길을 잃은 채 방황했어. 연수가 손짓으로 갈팡거리는 내 시선을 잡고는 은호야, 채란이가 만화책 좀 빌려달라는데 있니? 하는데 분명 내 이름인데도 어찌나 낯설게 들리던지. 당황해서 연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어, 어, 만화책, 어, 잠깐만, 하고는 가방에서 만화책 몇 권을 꺼내 던지듯 건네고 열람실 안으로 도망쳤어. 가방을 자리에 내려놓지도 않은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어. 그때 처음 알았지. 내가 연수를 좋아하나 보다.


   그날 이후로 연수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더라. 연수 생각만 해도 얼굴에 열이 오르고 가슴이 뛰었어. 그러면서 연수를 피해 다니기 시작했어. 연수 앞에만 서면 몸이 돌처럼 굳고 숨이 안 쉬어졌거든. 그런 모습을 연수에게 들킬까 겁났어. 더는 휴게실에서 만화책을 보지 않았고 화장실에 갈 때만 빼고는 열람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 그런 나를 보면서 점점 확신이 들더라. 내가 연수를 정말 좋아하나 보다.


   연수는 더 이상 평범하지 않았어. 운동장 한쪽 나무 그늘에 모여 앉아 지루한 체육시간을 보내는 40명 여자애들 중에서 연수를 골라내는 건 일도 아니었고 뭔가 느낌이 이상해 고개를 돌려보면 4인조에 섞여 수다를 떠는 연수가 보였지. 연수가 조금씩 내게 쌓였어. 내 턱에 닿을 정도의 키, 곧게 내려오다 안으로 말려 들어간 옆머리, 뿔테 안경 너머의 까만 눈동자, 고무줄로 조여진 검은색 츄리닝과 흰색 운동화를 잇는 가느다란 발목.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차곡차곡 머릿속에 쌓이더라. 아무 때나 연수가 멋대로 떠올라 넋이 나갔고 얼빠진 얼굴을 본 친구들이 얘는 어째 점점 바보가 돼 가는 것 같냐, 아닌가? 원래 바보였나? 하며 놀려댔지. 밤이면 머릿속이 온통 연수의 놀이터가 됐어. 이리 뒤척이면 하품을 할 때 입을 가리는 게 한 박자씩 늦던 하얀 작은 손이 떠오르고 저리 뒤척이면 머리를 위로 질끈 묶을 때 한쪽만 올라가던 가느다란 눈썹이 그려지고. 어쩌면 일부러 머릿속을 연수로 가득 채우려 했던 걸지도 몰라. 그럼 혹시라도 꿈에 연수가 찾아올까 싶어서.


이전 05화 사소한 고비 (5 / 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