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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Oct 04. 2024

신분 (2 / 6)

   2학년이 되면서 연수가 원래 다니던 독서실로 돌아갔어. 아쉬우면서도 다행이다 싶었지. 공부에 대한 열의를 이제는 좀 꺼내야 했으니까. 1학년 내내 만화책에 미쳐서 성적이 말이 아니었거든. 이대로라면 서울은커녕 지방 4년제 대학도 힘들겠다는 불안감도 들었고. 그래, 얼른 따라잡자, 내가 그래도 머리는 좋잖아, 하면서 공부에 열을 올렸어. 하지만 몇 달을 불태웠는데도 성적은 오르지 않았어. 나름 열심히 한 것 같은데 오히려 격차가 벌어지는 거야. 얼마간은 당혹스러웠어. 그런데 그 당혹감이 오래가지는 않더라. 성적표에 찍힌 등수에 익숙해지더라고. 안 해서 그런 거야, 할 때는 하위권 등수 따위가 내 것일 리는 없다고 믿었는데 했는데도 안 되네, 하니까 그냥 내가 그 정도인 사람이구나 싶더라. 수업시간에 멍하니 딴생각을 하는 시간이 많아졌어. 대놓고 책상에 엎어져 자기도 하고. 선생들은 이미 나에게 관심이 없었고 친구들도 나를 깨우지 않았지. 그저 하위권 등수가 하위권 등수에 걸맞은 행동을 하는 거라고 당연하다는 듯 내버려 두었어. 등수는 조금씩 더 떨어졌는데 떨어지는 정도가 적응 못할 만큼 급격하지 않아서인지 그리 괴롭지는 않더라.


   기말고사 성적표가 나오던 날, 반 전체가 술렁거렸어. 각자 등수를 받아 든 애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고 다들 입을 꽉 닫아 버려 적막뿐인데 교실은 더 소란하게 느껴졌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은 절망, 비관, 체념 같은 것들이 교실 곳곳에 웅크리고 있는 게 보였어. 나 혼자만 낯선 곳에 있는 기분이었지. 저들은 왜 저렇게 괴로워할까. 난 왜 저들처럼 괴로워하지 않는 걸까. 다음날 한 명이 결석을 했어. 담임도 오전 내내 보이지 않았고. 점심때쯤 담임이 교실로 와서 말하더라. 새벽에 스스로 손목을 그었다고.


   성적도 나보다 훨씬 좋은 놈이었는데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자신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일까. 깨져 버린 기대가 예리한 칼날이 되어 손목을 겨눈 걸까. 조금 무서웠어. 무서워서 내 손목을 한참 바라봤어. 손목이 생각보다 가늘더라. 손목 안쪽을 다른 손으로 매만지며 물었지. 내 기대는 충분히 작은가. 깨진 기대가 손목을 긋더라도 죽지 않을 만큼 충분히 작고 하찮은가. 기대가 커지지 않도록 돌덩이를 얹고 밑바닥으로 내려가자. 기대 따위가 자리 잡을 수 없는 초라한 곳에서 천민이 되자.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편하더라. 내 신분을 낮춰 버리고 스스로를 천민으로 여긴 건 어쩌면 방패 같은 것이었을까. 그럼으로써 나의 얇고 가는 손목이 지켜 질 수 있도록.


   연수는 공부를 꽤 잘했어. 서울에 있는 이름난 대학에 충분히 들어갈 정도의 성적이었거든. 감히 넘볼 수 없는 등수였지. 넘볼 수 없는 등수라는 건 곧 내가 넘봐선 안 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했어. 연수 신분은 지체 높은 양반가 자제쯤 되려나. 감히 천민 신분으로 양반가 자제를 탐한다는 건 멍석말이라도 당할 불경한 일이니까. 신분이 다르다고 생각하니 연수에 대한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더라. 그때 연수를 바라보는 건 뭐랄까. 연예인을 보는 느낌이랄까. 내가 김태희나 전지현을 좋아한다 해도 어느 누구 니 까짓게 무슨, 하면서 타박하지 않는 것처럼. 연수가 나에게 그랬어. 신분이 다른 나와는 연결될 리 없다는 게 너무나도 당연해서 연수를 좋아하는 게, 몰래 바라보는 게, 밤마다 잠 못 들고 뒤척이는 게 전혀 힘들지 않았어. 김태희나 전지현을 좋아하는 게 전혀 힘들지 않은 것처럼 말이야.


   애써 억누르던 기대가 2학년 가을 무렵에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어. 채란이 때문이었지. 저녁 내내 휴게실에서 빈둥거리는 걸 본 채란이가 또 만화책이냐, 하며 끼어들더니 근데 연수가 너 좋아하는 건 아냐? 하는 거야. 뭐라는 거야, 하고 만화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건성으로 말하니까 채란이가 보고 있던 만화책을 빼앗아 덮고는 연수가 은호 너 좋아한다고, 하며 성을 내더라고. 그제야 번쩍 정신이 들어서 나를? 연수가? 왜? 하며 되물었는데 채란이는 대답은 하지 않고 눈만 가늘게 했어. 눈만 껌뻑이는 나를 노려 보던 채란이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진짜 몰랐구나, 어쩐지, 그나저나 너 엄청 둔한 놈이네, 연수 표정이나 눈빛 보고 뭔가 느껴지는 게 없었어? 에휴, 답답아, 하며 한숨을 내쉬더라. 한참 동안이나 혼란스러웠어. 연수가 나 같은 애를 왜 좋아해. 도대체가 말이 안 되잖아. 머리에 새겨진 연수를 하나씩 꺼내 보았는데 아무리 꼼꼼히 들여다봐도 너를 좋아해서 짓는 표정이야, 라든가 너에게 빠져 버린 눈빛이란다, 하는 흔적을 못 찾겠는 거야. 연수의 표정과 눈빛은 나를 강하게 끌어당기긴 했지만 그 힘은 나뿐 아니라 모두에게 적용되는 중력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날 밤 머릿속 연수는 이전의 연수와는 달랐어. 연수가 처음으로 나를 보며 웃었거든. 내가 고개도 못 들고 애꿎은 땅만 발로 툭툭 파헤치고 있으니까 연수가 내 동작을 따라 하면서 깔깔대더라. 연수는 매일 조금씩 다가왔어. 다음날은 먼저 살갑게 말을 건넸고 며칠이 더 지나서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어. 내가 생각보다 괜찮은 놈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기더라. 연수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나여도 그게 그렇게까지 불경한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기대도 품어지고.


   채란이의 말 이후로 연수가 보일 때마다 표정과 눈빛을 몰래 쫓았어. 나를 좋아하는 게 사실이라면 자신은 모르는 서투른 표정과 머뭇거리는 눈빛이 있지 않을까. 내가 그랬으니까. 괜히 연수에게 한 걸음 다가가고 우연인 듯 옆을 지나가고 돌아서면 한 번 더 쳐다봤으니까. 좋아하는 감정이 묻어있는 행동의 어색함은 자신만 모를 뿐 다른 사람 눈에는 다 보이니까. 하지만 모두 헛수고였지. 연수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어. 우연처럼 내 옆을 지나가지도 않았고. 연수에게선 단 하나의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를 좋아한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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