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현 Oct 07. 2024

신분 (3 / 6)

   연수의 흔적을 찾느라 정신없던 10월,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채란이가 나를 불러내더니 편지 한 장을 건네줬어. 연수가 쓴 거야. 보내지도 않을 편지를 그렇게 써 댄다. 몰래 하나 챙겼어. 읽어 봐. 채란이가 편지를 건네주고 가면서 한마디를 더 보탰어. 옆에서 지켜보기가 어찌나 답답하던지. 교실로 돌아와 급하게 편지를 꺼내 읽었어.


 아까 저녁을 먹는데 케첩이 묻은 소시지를 옷에 흘렸지 뭐야. 휴지로 닦아내고 물로도 씻어 봤는데 잘 지워지지가 않아. 그러다 옷에 묻은 자국을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그 모양이 앉아 있는 고양이 같은 거야. 빨간색 고양이 본 적이 있니? 참 이쁘단다. 저녁을 너무 많이 먹었는지 자꾸 졸리길래 친구 CD플레이어를 빌려서 음악을 들었어. 김광석이 부르는 <사랑했지만>이라는 노래가 너무 좋더라. 가사가 참 마음에 들어. 안 들어봤다면 너도 꼭 한번 들어 봐.


   지금 옆에서 자율학습 시간 내내 엎드려 자고 있는 녀석이 쓴 편지라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일상적인 편지였어. 골라 쓴 단어에 숨겨진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 나무를 보면 보일까. 숲을 봐야 보일까. 몇 번을 더 꼼꼼히 읽어 봤는데도 잘 모르겠더라. 문득 노래 가사가 궁금해졌어. 옆에서 자고 있는 녀석을 깨워 김광석 꺼 사랑했지만 알지? 그거 가사 좀 적어줘 봐, 하고는 자다 깬 녀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연습장에 휘갈겨 써 내려가는 가사를 쫓아 읽었지.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이건가. 이 말을 전하고 싶었던 건가. 연수도 나처럼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었던 건가. 요동치는 가슴이 진정되지가 않더라. 이틀 후, 채란이를 통해 연수에게 내가 쓴 편지를 보냈어.


   사귀는 사이가 되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연수를 만날 줄 알았는데. 그게 그렇게 되지가 않더라. 그럴 수가 없었어. 만나자고 하는 게 연수의 시간을 빼앗는 것만 같았거든. 연수의 공부를 방해하는 걸림돌 따위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거야. 보고 싶은 마음이 쌓이고 쌓이다가 밖으로 넘쳐서 더는 안 되겠다 싶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만나자는 연락을 했어. 연락을 하더라도 최대한 짧게. 내일 자율학습 끝나고 집에 데려다줄까? 대답이 오면 서둘러 대화를 끊어 내는 인사. 그럼 내일 봐. 연수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저녁은 맛있게 먹었는지 옷에 반찬을 흘리지는 않았는지 묻고 싶지만 나 때문에 늦게 잠들면 안 되니까. 그럼 내일 공부에 방해되니까. 다시 한번 마음을 꾹 눌렀어. 그게 연수에 대한 배려라고 믿으면서.


   정말 사귄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둘이 나눈 추억이 없었어. 데이트라 할만한 건 김광석 추모 콘서트를 보러 대학로에 간 것, 그리고 앞으로 다니게 될지도 모를 대학교를 구경하자며 신촌에 간 것, 그 두 번 뿐이었어.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몇 번 연수 집까지 함께 걷긴 했지만 그래 봐야 20분이 채 안 걸렸으니. 참 별것 없는 연애였어. 연애라 말하기에도 우스웠지.


   아직은 바람이 차갑던 3월, 성격 급하게 벚꽃을 터뜨린 벚나무 한 그루가 하얗게 가로등 불빛과 어우러지던 길에서 연수에게 헤어지자고 했어. 고등학교 3학년에게 연애란 어울리지 않는 옷 같은 거니까. 신촌에 있는 대학에 못 가면, 그래서 신촌에서 4년을 보내고 싶다던 연수의 바람이 틀어지면 그건 모두 내 탓일 것만 같았어. 연수를 위해서라면 지금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게 맞는 거라고 스스로를 세뇌했어. 어쩌면 겁이 났던 걸지도 몰라. 연수를 따라 신촌에 가지 못하면 어떡하나. 내 하찮은 신분이 드러나면 어떡하나. 그래서 천민인 나를 연수가 부끄러워하면 어떡하나. 연수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이 바로 나일까 봐 두려웠던 거야. 그만 만나자고 했을 때 연수는 마치 내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그래, 알았어, 잘 지내, 라는 말만 남겨두고 돌아섰어. 이유도 묻지 않고 말이야. 이별이라는 것이 이렇게 쉬운 거였나. 절차에 맞게 제대로 이별한 게 맞는 건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데 빠앙, 하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리더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도로 한가운데에 서 있는 거야.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민 운전자가 내뱉는 거친 쌍욕을 들으면서도 아무런 동요가 없었어. 그냥 아, 사고는 이렇게 나는 거구나, 다들 누군가와 헤어지고 넋이 나가서 그런 거구나, 하는 생각만 들더라. 그날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는 기억이 안 나. 웃긴 건 그날 밤 나도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을 한 거야. 이제 이별의 아픔, 고통을 경험했구나, 이별을 했으니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북받치는 눈물을 쏟아 내면 되겠구나, 했는데 아무리 짜내어봐도 눈물은 나오지 않더라. 밤새 잠들지 못하고 괴로워할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은 없었어.


   연수는 결국 신촌에 있는 대학에 갔고 난 재수를 결심하면서 바라던 신촌에서의 재회는 이루어지지 않았어. 연수에게 나도 신촌이야, 하며 연락할 명분마저 사라진 거지. 수능 당일에 연수가 몸 컨디션이라도 좋지 않아 시험을 망쳐 버리고 형편없는 성적표를 받아 들고 괴로워하다가 신촌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한번 더 도전하겠다고 마음먹기를 바랐는데, 그래서 재수생 신분으로 다시 만나 1년을 함께 하기를 바랐는데 역시나 그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더라. 새로운 신분이 생겼어. 대학생과 재수생이라는 신분. 서로 만나기엔 어울리지 않는 신분. 어쩌면 맞지 않는 옷을 벗은 것처럼 마음이 편했는지도 몰라. 이제 더는 연수에게 부끄러울 일은 없을 테니까. 전처럼 뒤에서 바라보기만 할 뿐이라면 지금 내 신분으로도 충분하니까. 여름이 시작될 무렵 연수에게 같은 학교에 다니는 남자 친구가 생겼고 가을이 되면서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채란이를 통해 들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